할머니가 그리운 모든 이들의 초상
* 스포없습니다! 안심하고 글 읽어주셔도 되어요 :)
반지의 제왕, 호빗, 스타워즈 시리즈, 스타트랙 시리즈는 물론 마블 시리즈까지 SF와 판타지 블록버스터 대작을 좋아했던(하는) 나는 어느날 부터인지 'La Famille Belier(한국제목 : 미라클 벨리에)', 'Back to Burgundy (한국제목 : 브루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와 같이 전원적인 환경에서 가족끼리 평온하게(?) 지지고 볶는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린시절 시골의 대가족으로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일상과 도시의 복잡함에 지쳐서 그런 영화를 찾아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 '미나리'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상 받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의 영화에 윤여정 배우가 출연한다는 소식'이 들려올 무렵부터 '나중에 개봉하면 꼭 봐야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슬슬 까맣게 잊혀질 무렵, 영화는 북미권의 수상실적과 입소문을 타고 우리나라에 날아왔다. 영화 미나리의 국내개봉 시점이 좀 늦은감이 없잖아 있는데, 홍보 또는 배급 전략 때문일까? 윤여정 배우가 출연하는 TVN의 '윤스테이'도 TV에서 성황리에 방영이 되고 있는 현재, 영화 미나리는 어마어마한 화제를 몰고 3월 3일(수) 개봉되었다.
영화 '미나리'는 그냥 개봉날 보고 싶었다. 관심도 있었고, 왠지 이런 스타일의 영화를 많이 응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나리는 많은 미디어에서 소개되었듯 미국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이며, 이 영화의 감독인 정이삭 감독의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어린 남자아이 '데이빗(엘런 킴)'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데이빗은 관찰자로 존재하기도 하고 직접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자꾸 김유정 작가의 소설 '동백꽃'이 생각나는 영화다(병아리가 나와서 더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연출을 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저예산 영화여서 그런 것일까? 카메라가 잡는 여러가지 인물들의 시선들과 감정들이 복합적이고 복잡하지도 않았다. 그냥 아이의 눈에 투영되는 모습을 직시하는 느낌인데 특히, 배우들의 얼굴 클로즈업이 많아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5세 어린이 '데이빗'과 같은 시점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한 화면에 배우들의 머리 정수리부분이 대부분 잘려 나오는 것에 위화감이 들어 '왜 이렇게 바짝 붙어서 배우를 촬영했지?' 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린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부모는 다 크고 꽉차고 그랬던 것 같다. 나도 어린 시절, 어른들과 이야기 할 때를 더듬어 보면 어른들은 꼭 눈을 맞춰서 이야기를 해주셨었다. 그러면 내 시선에 그 분들의 얼굴이 꽉 차는 것은 물론, 그 분들의 눈동자가 거울처럼 나를 비추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 것이 연출자의 의도인지 아니면 정말 저예산 영화이기 때문에 화면 전체에 꽉- 배우들의 얼굴(배우의 연기력으로 승부!)이 잡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랜만에 어린이의 시선을 볼 수 있어 좋았다.
* 여담이지만 한스 옵 드 벡 이라는 벨기에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 중 '테이블' 이름의 작품이 있다. 이 테이블이라는 작품은 성인 남성 크기로 '밥을 먹고 있는 식탁'을 표현한 3차원 입체 작품으로, 관람자를 7세 아이의 시선으로 만들어 버린다. 미나리의 전체적인 화면구성도 마치 그 작품을 관람하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어쩌면 나도 내 어린시절이 많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토종 한국인이고 해외이민을 경험하지도 않았지만 영화 전반의 이야기에 몹시 공감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인데, 우리 할머니는 윤여정 배우가 연기한 미나리의 '순자'와 다르게 막 너스레를 떨거나, 농담을 많이 하시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네 살부터 내 방이 생긴 7살까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잤었고 중학교 2학년까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유년시절의 기억 속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몹시 크다. 7세 이후, 내 방이 생겨서 혼자 자던 내가 여름밤에 치는 천둥번개가 무서워 몹시 짧은 대청마루(바로 옆방임)를 질주해 할머니 옆으로 쏙 기어들어가 할머니 손을 잡고 잔 적도 많았다. 휴먼으로 태어나 기억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 밤의 무서움에 대해 알고 나서 가장 많이 의지했던 것이 바로 할머니였었는데, 영화 미나리에서는 할머니와 손주들간의 어떤 유대관계와 이와 맞먹는 어색함에 대해서도 참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내게 이 영화는 영화를 보는 중에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집에 와서 영화에 대해 생각할 때 눈물이 나는 영화다.
나는 영화나 미디어를 접하며 잘 우는데, 이 영화에서는 몇 군데 찡한 장면이 있긴 했지만 막상 눈물이 줄줄 흐르지는 않았다(감정에는 개인차가 있으니 이해해 주세요 ㅎㅎ). 그러나 집에 오니 엄청 눈물이 나더라. 영화 미나리는 이민자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단함과 서러움, 무엇인지도 모를 것에 대한 야속함 등도 녹아 있겠지만, 나와 같은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세대교체가 일어나는(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 부모님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시는 시기) 요즈음 떠나버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버리는 영화로 새겨질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미나리도 '냄새'의 시각적, 청각적 묘사가 뛰어나다는 것인데 예고편에도 소개 되었지만 데이빗이 말하는 '한국 냄새가 나는 할머니의 냄새'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올 정도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독특한 체향이 발산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인테리어를 시공하시는 분들이 할머니, 할아버지의 방에는 방향제를 비치하거나 환기가 잘 될 수 있도록 설계한다고 했는데, 어린시절 우리집에서도 유일하게 방향제가 놓여있던 곳이 바로 할머니 할아버지 방이었다(물론 '모과'도 많이 놓여있었다). 영화는 이러한 후각적인 요소들을 꽤나 영리하게 풀어내고, 또 상상하게 만들어서 나는 왠지 극 중 캐릭터와 함께 울어야 할 장면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조금 조심스럽지만 약간 미나리 홍보할 때 신경써줬으면 하는 소소한 것이 있는데, 미나리 가족 중에는 바로 데이빗의 누나 '앤(노엘 조)'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데이빗이 극을 이끌어가긴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앤'의 연기와 캐릭터에 많이 몰입되었다. 데이빗도 데이빗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많이 성숙해야했고, 지쳐있었던 '장녀' 앤도 좀 많이 조명해주시고, 소개해주셨으면 좋겠다. 배우 노엘 조의 연기도 뛰어나서 자칫하면 세대 간 연결고리가 끊어졌을 수도 있는 그 여러가지 상황들을 '앤'이 적절히 가교 역할을 해주고 있어서 영화 흥행에 공이 절대 적지 않다. 노엘양도 많이 많이 소개 부탁드립니다!!!!
그 외 1)
영화를 보러 영화관 가는 길에 카카오톡으로 소소하게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분위기 영어공부가 되었는데, 마침 미국에 계신 분이 "심심해서 ... 교회도 알아보고 있고 그래요"라고 말씀을 하셨다 ... 세상에... 영화 보는 중에 입틀막.... 미국이라는 나라 너 대체...
그 외 2)
역시 미나리의 백미는 고스톱이다. 아 너무 구수해서 미국영화 안 보는 줄...
그 외 3)
내가 너무 많이 스릴러/판타지/액션을 많이 봐 왔는지 그리고 클리셰에 너무 학습이 많이 된 것인지 혼자 상상한 뒤에, 초조했던 장면이 많았다. 미나리 막 그렇게 쫄리고 그런 영화 아니니까(봉감독님 박감독님 스타일 절대 아닙니다 ㅋㅋㅋ) 보실 분들은 마음 편히 가셔서 보셨으면 좋겠다(단, 개인방역수칙 잘 지키고 가세요!!)
그 외 4)
한국인이면 손재주가 좋고 손에 근육과 신경이 발달해 미국가면 병아리 감별사로 돈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음... 생각 많아짐.
그 외 5)
스포 방지를 위해 더 이상의 말은 생략한다(근엄). 하지만 진짜 재미있는 장면들, 나름대로 잘 설계된 장면들도 많아서 영화를 보는 내내 소소하게 뿌듯했다.
정말 진짜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불안하기도 해서 애초에 영화 예매할 때도 동서남북 거리두기 좌석인 곳을 골라 앉았고, 시간대도 점심시간대로 찾아서 예매했다. 그런데 미나리가 정말 화제의 영화이긴 한지, 영화관 도착 하자마자 카메라 세팅하는 언론사들을 보았고 영화관에서 나오는데 내 바로 앞에 분이 인터뷰 대상자로 잡혀(?) 당황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엔딩크레딧 다 보고, 앞에 분 나가시는 거 보고 나왔는데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좋은 영화가 개봉한 만큼 빨리 '이 시국'이 진정되어서, 더 편하게 그리고 더 많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