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의 중요함을 부쩍 느낀다. 조금 더 일찍 글을 써야겠다. 최근 들어 내가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임을 자주 깨닫는다. 책이 아까워 줄을 치지 않고 읽어 왔지만 이제 바꿔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행복했던 문장들과 생각의 시작이 되어준 문장에 줄을 그으며 읽어볼 생각이다. 조금 더 나아지길 기대한다.
내가 읽거나 전하는 글의 대부분은 펙트를 전달하는 내용이 중심이기에 서평을 작성하지 않는 편이지만 라디오에서 듣게 된 우연한 추천과 딸아이에게 추천해줄 마음으로 집어 들게 되었다. 하지만 평단과 독자들의 좋은 반응이 가득했던 '산책을 듣는 시간'을 조금 다른 감정으로 읽게 되었다. 그 조금은 다른 느낌을 내 감정과 기준에 주관해서 전달하고자 한다. 문학적 소양이 낮은 나의 평가를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그저 변방의 '소견' 정도로 생각하길 바란다. '산책을 듣는 시간'이 내게 작은 화두임을 주지한다.
한 소녀의 상상으로 만들어가는 자신만의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 헌신적인 어머니의 양육과 아이를 향한 열정(가끔 모나고 부족해 보이더라도...), 밝고 착한 고모, 인자하고 현명한 할머니. 그 속에서 성장하고 사랑하며 하나의 인간으로 자리 잡아가는 듣지 못하는(적어도 그녀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소녀의 이야기다. 많은 독자들이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인트로 한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가의 표현력에 빠져들게 된다. 나 또한 책을 덮을 때쯤엔 작가의 표현력에 빠져서, 또 요즘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에 최신 페미니즘과 휴머니즘으로 무장한 표현을 수용하며 약간 활기찬 해피엔딩으로 결론지었다. 결국 모두를 위한 길은 이것뿐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이 책을 칭찬하는 대중의 찬사 뒤로 줄 서려 했다. 하지만 뭔가 거슬리는 이 불편함은 정리해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미쳐 중반에 다다르기도 전에 짜증이 난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표현 속에 덮어놓은 이야기는 소름 끼친다. 4명의 주인공.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은 이 네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작중 ‘나’를 중심으로 '내'가 이야기하는 네 사람의 이야기다. 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이기적인 소망을 위해 상황을 바꿔왔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자신과 '나'의 삶을 바꿔버리고 던져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유를 언제나 밖에서 찾았다. 그들에게서 자책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다.
작가의 가족관이 나의 가족관과 달라 틀리다는 표현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가족관에 대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현실이 난 이상하리 만큼 답답하다. 요즘 세상에는 찾아보기도 힘든 구시대적 가족관(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남편의 어머니와 시누이 그리고 장애를 가진 딸을 봉양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여자는 80년대 드라마에서 종종 보던 캐릭터 아닌가?)을 가져다가 기승전도 없이 갑자기 미래의 가족상으로 결론을 연결하니 적잖이 당황스럽다. '밀레니엄 세대'가 가족을 이루어 '밀레니얼 패밀리'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속의 밀레니얼 엄마는 자기희생보다는 자기 행복을 추구한다고 한다. 요즘 자주 보는 트렌드 리포트들이 그렇다고 한다. 그럼 트렌드 리포트 말고 지금 우리 주변의 엄마들은 밀레니얼 패밀리 들인가? 분명 세대는 밀레니얼 패밀리지만 트렌드 리포트가 말하는 스타일의 가족을 찾기란 쉽지 않다. 트렌드 리포트는 이미 개인주의의 중심까지 들어갔지만 우리의 삶은 아직 거기까지 옮겨가지 못하고 조금씩 이동 중인 듯하다. 작가의 의식 속의 가족보다 나의 걸음이 느려서 인지 내게는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끝까지 자신이 가진 것을 놓지 못하던 할머니는 끝까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영원히 돌봐주어야 할 대상으로 남는다. 그로 인해 결정지어질 ‘나’의 행복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좋아하고 있지만 3자인 나는 불편하다. ‘엄마’는 그 긴 세월의 헌신이 모두 돈을 위한 인고의 세월이었다. '엄마'의 입장이 어떤지는 설명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나는 그렇게 읽었다. 작가는 은연중에 ‘엄마’의 편을 들고 있어 보인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꾸준히 준비해왔다. 조용히 사라지기 전 ‘엄마’가 몰래한 준비는 ‘나’의 혼자 살아가기가 아니라 ‘엄마’의 비행기표와 학교 입학이었다. 그녀는 끝내 모든 인연을 정리한다. ‘고모’는 모든 사건을 정리하는 극의 주변인 이다. 하지만 내용으로 유추했을 때 그녀 또한 성장하며 그들의 삶과 거리를 두는 것 만이 삶의 돌파구라 생각했던 듯하다. 그녀는 적당이 걱정하고, 적당히 참견하며, 적당히 정리하기 좋은 위치에 있다. 우리는 그 적당한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적당한 몇 마디에 언제나 가장 크게 흔들린다. 어쩌며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고모'의 손을 잡기 위해 노력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마저 떠난 '나'는 '나'의 삶을 시작한다. '한민’과 함께하는 사업이 유명(?)해지고 글은 마치지만 '한민'은 '나'의 새로운 의지자는 아닐까? 할머니, 엄마, 고모의 빈차를 채워줄 혼자 서지 못하는 ‘내’ 삶의 보호자. 아니 어쩌면 이제 입장이 바뀌어 '한민과 마르첼로'는 '내'가 되고 '나'의 입장은 '할머니, '엄마', '고모'가 될지 모른다. 어느 경우던 ‘나’는 '나' 만의 삶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한동안 불편했다. 나의 감수성으로 그들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가족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자세 대해서 그들은 요즘을 살아가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 주었다. 또 트렌드가 시대를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트렌드가 시대를 주도한다는 또 다른 고민을 던져 주었다.
글의 전개를 알리지 않고 느낌을 전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나의 고민과 별개로 일독을 권한다. 읽고 나면 뭘 그리 불편해했는지, 그리고 불편도 잊을만한 표현력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읽는 동안 편안한 휴식이 될 것이고 읽고 난 뒤에는 시대를 걱정하는 화두를 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