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적절한 방임이 나에게 준 선물
난 잠이 들면 웬만해선 중간에 깨지 않는다. 알람 소리가 울리면 그게 나의 첫 기상이다. 그 날은 왜 중간에 깼는지 명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밤에 갑자기 눈을 떴고 다시 잠이 안 와 멀뚱 거리다 졸린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야심한 시간이었는데 열린 안방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화장실을 가려고 안방을 지나치려는데 "둘째"라는 소리에 나의 귀가 자동반사적으로 쫑긋거렸다. 아빠 목소리였다.
"우리 둘째는 저러다 나중에 사회생활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애들은 열두 번 변한다잖아요, 좀 더 크면 달라지겠지 뭐"
"괜찮다가 한 번 성질부릴 때 보면 정말.... 저 고집을 누가 당해"
"매번 그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가잖아요"
"그 어쩌다 한 번이 웬만해야 말이지.."
"그래도 나중에 사회생활하려면 너무 순해 빠져서 휘둘리는 것보다 그게 나을 수도 있어요"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두 분 모두 사뭇 진지했다. 난 피식 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까치발을 하고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어느 정도 자기 객관화가 된다는 점이었다. 옳다 생각하는 것에 대한 굽히지 않는 고집과 가끔 화날 때 뾰족한 언어로 상대방의 감정을 배어 상처를 내고야 마는 말의 비수.... 언니, 동생과 비교해도 내가 어지간한 성격이긴 했다.
하지만 스스로에 대해 잘 아니 부모님께 호되게 꾸중 듣거나 해도 그때만 분에 못 이겨 혼자 씩씩거리고 말았다.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아니 혼나서 서럽다거나 섭섭함 등의 앙금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당시에는 화가 났지만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 혼날 짓을 하니 혼났고 맞을 짓을 하니 맞았다가 늘 나의 결론이었다. 그렇다고 입 밖으로 내어 인정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나 같은 딸은 나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엄마한테 얘기하곤 했다. 그날 밤 우연히 듣게 된 두 분의 대화에 '나에 대해 저런 생각까지 하시는구나' 싶어 오히려 웃음이 새어 나온 건 나 자신을 잘 알기에 그럴만하다 싶어서였다.
난 어린 시절 기억력이 유독 좋다. 본인들은 기억조차 못 하는 언니와 동생의 어린 시절 기억까지 내가 갖고 있다. 내 기억으로 난 5살 때부터 어른들께 존댓말을 사용했다.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 좀 달라졌지만 나의 세대에 가정교육의 주체는 주로 엄마였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의범절, 공공장소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 공중도덕, 정직, 독립심 등 기본적으로 갖추고 살아야 할 가치에 대한 교육에 있어 엄마는 꽤 단호하고 엄하신 편이었다. 실제 나는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 강한 아이였지만 기본적으로 가정교육의 범주 안에 드는 평가 기준에 어긋나는 적은 없었기에 외부에서 바라보는 나는 항상 예의 바르고 차분한 아이였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다르게 비판의식이 강한 편이었던 나에게 당시 외부세계는 너무나도 권위적이었다. 보편적인 게 옳은 거라 강요했고 그 안에 속하지 못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단체생활에서는 튀지 않고 적당히 묻어가는 게 안전한 거란 걸 알았지만 때로는 마음속에서는 비판적 사고의 DNA가 수시로 꿈틀거렸다.
그나마 권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집안 환경은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군부 시대를 경험한 세대인 걸 감안하면 우리 집안 분위기는 요즘의 가정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남아 선호 사상이 어느 정도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을 시절이었음에도 이런 구분이 왜 필요한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자랐다. "공부는 인력으로 되는 거 아니다. 공부는 다 때가 있다"라는 교육 방식을 가지고 있던 엄마 덕분에 남들만큼의 수험생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았다. 물론 엄마의 교육관과는 별개로 나 스스로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엄마는 여자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며 사회생활하지 않을 거면 굳이 대학 갈 필요 없다고도 하셨다. 사회적 기준이나 좋은 상대를 만나기 위한 맞춤용이라면 그건 시간, 재능, 돈 낭비라고...
일방적으로 듣고 따라야 하는 대상이 아닌 대화가 통하는 대상이 가족 중에 있다는 건 당시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남들과 같은 평균으로 묻어가기 위해, 때로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서 묻어두고 꺼내 놓지 못한 마음속 말들을 터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엄마였으니까... 친구들에게 조차도 그런 깊은 얘기는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완벽히 이해받지 못할 테고 너무 진지하고 비판적인 사람으로 비치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있었다. 깊고 진지한 얘기로 인해 어색해질 공기를 감당하기엔 사춘기 소녀의 감수성이 한참 예민할 시기였다.
다행히 고집과 자기주장은 나이가 들며 독립적인 성향과 자존감으로 발전했다. 고집 센 나를 부모님이 잡으려고만 하셨다면 반항심으로 청개구리처럼 엇박자를 내고 튀어 나갔을지도 모른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기준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엄하셨지만 한 개인으로서의 딸의 삶을 당신의 사고방식 안에 가두려고만 하지 않았던 적절한 방임은 오히려 나를 자기 주도적 인간으로 성장시켰다. 내 고집대로 밀어붙인 일들에 대한 마음속 책임감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내가 고집해서 벌인 일들이 나쁜 결과로 인해 '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말을 듣기에는 나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무언가를 고집할 땐 그에 따른 책임도 온전히 내 몫이란 걸 20대에 깨달았다.
무관심과 적절한 방임은 전혀 다른 의미다. 실패하지 않을 안전함 안에 가두려고만 하는 게 오히려 자녀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 실패할 기회를 부모의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가로막는 건 자녀가 단단해질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대신 무언가를 해주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고 응원하는 그 시선과 마음이면 충분하다.
굳은 살을 미리 들이고 단단한 마음의 근육을 일찍 키울 수 있게 한 적절한 방임이 고집 센 둘째 딸에겐 가장 현명한 가정교육이었다. 안전함에만 가두려고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자녀의 남은 삶의 여정이 더 안전해진다. 더 빨리 부모에게 정신적인 독립을 하게 하는 게 미래 관점에서의 안전함이라는 걸 난 경험을 통해 확인했다. 살아온 세월이 더 길어 경험이 많으니 자식이 따라야 할 사람이 아니라 자녀가 진정한 어른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성장할 수 있도록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는 걸.... 부모님의 적절한 방임은 내가 나로 설 수 있게 지탱해 준 뿌리와도 같은 거였다. 덕분에 좀 더 일찍 나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사회생활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 듣던 고집 센 둘째 딸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사가 만사다'라는 HR직무에 오랜 기간 몸 담으며 직무 자체를 덕질하는 '덕업 일치'의 삶을 오랜 기간 실현하고 있다. 공적 영역에서의 직무 덕질은 사람, 인간 심리, 그리고 '나'에 대한 본질적인 사유라는 사적 영역의 성장으로까지 이어졌다. 근무했던 곳들에서 만난 수많은 소중한 인연들은 여전히 내 인생에서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자리하고 있다.
결국, 중학교 시절 부모님께서 나를 두고 하셨던 대화는 다행히도 완전한 기우였다. 하지만 그 대화가 완전한 기우가 될 수 있었던 데는 나의 노력 이외에 부모님의 적절한 방임이라는 지분이 상당했음을 당신들은 알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