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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리셋코치 Feb 24. 2021

감상용.. 소장용.. 순장용..

'덕후'의 인생이란...

음악 좋아하는 덕후는 소장 욕구가 있다. 주된 감상은 '서양 수박'일지라도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앨범이 발매되면 꼭 두 개를 구매한다. 감상용과 소장용... 그런데 얼마 전 진정한 덕후는 세 개 구매가 필수라는 얘기를 들었다. 감상용... 소장용... 그리고 순장용...^^;; 도대체 이런 기발한 언어는 누가 창조해 내는 걸까? 단 한 번도 덕질을 해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용어다. 그들은 소장용도 이해 못할 테니까... 난 아직 2단계다. 언박싱하는 감상용, 그대로 보관하는 소장용... 가끔 주변인 입덕 시키려고 세 개를 구매할 때도 있다. 성공 확률은 반반이지만...


10대 때부터 밴드 음악을 좋아해 공연장에 다니던 습관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관보다 공연장 간 횟수가 더 많을 거다. 술은 끊어도 커피는 못 끊는다. 여행은 안 가도 공연장은 가야 한다. 고등학교 때 다행히 나처럼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늘 그 친구와 함께 공연장을 다녔다. 티켓 금액이 고등학생으로서는 만만치 않았지만 '공부는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공부는 다 때가 있다'는 독특한 교육관을 가지고 계셨던 엄마가 철없는 고등학생 딸의 공연비를 대주셨다.  


지금처럼 지정좌석제가 아닌 때라 공연 시간 7-8시간 전...때로는 10시간 전에 미리 가 공연장 밖에서 자리 잡고 기다리곤 했다. 공연장 게이트가 열리면 쭉 일렬로 줄 서 있었던 게 무색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우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나 역시 체력장에서도 하위권이었던 100미터 실력이 거기서 발휘되곤 했다. 도대체 그 신묘한 스피드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덕후의 공력이란 참으로 놀랍다.

인디 음악이 메인스트림은 아니니 주변인 중 나와 비슷한 취향의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다. 특히나 내 나이에 공연장을 가는 사람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이다. 나와 비슷한 정도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난 그냥 혼자 간다. 나에게는 10대 때부터 들인 자연스러운 습관이다. 생각해 보면 계기가 있었다.


90년대 초반, MC 해머 내한 공연 공짜 티켓이 한 장 생겼는데 혹시 갈 거냐고 언니가 물었다. 평소 공연을 많이 보러 다니긴 했지만 그래도 혼자 간 적은 없기에 언니도 내가 거절할 거라 생갔했을 거다. 아무도 혼자 가려는 사람이 없어서 순서가 나에게까지 온 거였으니까. 사실 내가 아는 곡은 'U Can't Touch This' 한 곡 밖에 없었지만 공짜라는 말에 혹해 난 일초의 고민도 없이 "응, 나 갈래!"하고 표를 받았다. MC Hammer는 랩이라는 흑인 음악을 메인스트림으로 올리는데 공헌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힙합은 아니다. 그냥 신나는 댄스음악에 가깝다.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 한 두곡 히트 치고 조용히 사라진 아이콘 같은 존재였다.... 지금 뮤비를 봐도 촌스럽지만 엄청 신난다.  


공연이 평일이었는지 주말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교복을 입고 갔던 걸로 봐서는 아마도 평일 저녁이 아니었을까 싶다.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했는데 교포들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내 주변에서 한국말보다 영어가 더 많이 들렸다. 백업댄서들의 현란한 댄스와 함께 열기가 고조되자 갑자기 사람들이 공연장 플라스틱 의자를 밟고 일어나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안전요원들도 제지하지 않았다. 밴드 공연을 수없이 다녔지만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의자 위로 올라가 춤추며 보는 공연은 처음이었다. 나도 질세라 얼른 의자 위로 올라갔다. 어차피 그러지 않으면 무대가 보이지조차 않았으니까. 교복 입고 신나게 춤추면서 보는 내가 귀여웠는지 주변 20대 언니... 오빠들이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공짜표가 한 장 생겨 혼자 왔다고 하니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난생 처음 맛보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여기저기 들리는 영어에... 땀에 젖을 정도로 춤추면서 보는 공연이라니.... 물론 남들처럼 가사를 따라 부를 수 없어 아쉬웠지만 누구보다도 신나게 반응하며 놀았다... 이마와 등이 땀에 젖고 머리카락은 얼굴에 들러붙고...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난리였지만....

그때부터였다. 굳이 나처럼 해당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혼자 공연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 게. 어린 나이에 습관이 들어 그런지 나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어쩌면 음악 회사에 입사해 오랜 기간 근무했던 것도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근무 기간 내내 수많은 공연 관람 기회가 있었다. 유명 팝 아티스트 내한 공연부터 롹, 클래식, 재즈 공연, 각종 뮤직 페스티벌, 뮤지컬까지.... 내가 좋아하는 공연을 공짜로 보러 갈 수 있다는 건 나에게는 가장 큰 복리후생이었다. 지금도 교육비와 더불어 내가 유일하게 과소비하는 분야다.


물론 나의 덕질 분야가 음악만은 아니다. 난 호기심이 많다. 호기심이 많으니 끊임없이 좋아하는 게 생긴다. 좋아하니 에너지를 쏟게 된다. 그래서 인생이 지루할 틈이 없다. 알아야 할 것과 좋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다만 덕질에는 시간, 비용, 에너지가 든다. 근래 큰 에너지를 몰빵 해서 쏟아야 할 일이 생겼다. 당분간 작은 에너지 낭비를 줄여야 한다. 산만하게 뻗쳐있는 호기심을 잠시 멈추고 집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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