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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나무 Sep 17. 2023

아빠, 할머니께 도대체 왜 그러세요?

효자 아래 효자 난다. 

아빠는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어요. 가끔 할머니에게 아빠 어렸을 적 얘기가 궁금해서 물어보면, 


"아버지는 속 한번 안 썩이고, 혼자 잘 컸어. (학교가 머니까) 아침이면 고봉밥을 물에 말아 호로로록 물 마시듯 먹고는 씩씩하게 학교 가고. 우리가 없이 살아서 잘 못해줘서 미안하지. 그때는 다 그랬지."


아빠는 사춘기도 없었는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효자 중에 효자 아들이었다고 해요. 아빠는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바로 취업을 했고, 회사 월급날이면 때 맞춰 할아버지가 아빠에게 와서, 수금(?)을 해갔다고 해요. 


아빠가 90년대 첫 차를 구매해서 할아버지댁에 가서 시승식을 했던 것이 기억이 나요. 매우 어린 나이였지만, 뿌듯해하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미소가 아직도 잊히질 않네요. 할아버지는 농촌에서 인삼농사와 벼농사를 지었고, 운송수단은 경운기와 오토바이가 있었어요. 하루는 아빠에게,


"보현아,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하시더니, 경운기로 최고속도를 내시고 아빠차로 따라오며 최고속도를 알려달라고 했어요. 


할아버지 경운기가 굉음을 내며, 최고속도를 찍을 때, 아빠는 경운기 뒤를 졸졸 따라가며, 속도계 바늘에 시선을 고정했어요. 경운기는 속도계가 없었기 때문에, 당신의 가장 아끼는 손과 발 격인 '경운기' 자체의 시속 자체에도 궁금하셨겠지만, 커서 생각 해 보니 아빠 차에 대한 흐뭇함이 더 컸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당신만의 뿌듯함과 보람을 표현했던 것 같아요. 


비교적 빠른 나이에 성공했던 아빠는 30대 초반에 땅을 사서 그토록 염원하던 3층 단독주택을 지었어요. 그 당시, 그 동네에서는 가장 크고 멋진 집이었어요. 동네사람들이 구경올 정도로, 튼튼하고 견고한 3층집이었어요. 1층, 3층은 세를 주고, 가장 넓은 2층을 우리 가족이 사용했어요. 내가 7살 때, 우리 가족만의 새 집이 생겼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집을 처음 방문 했을 때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요. 얼마나 흐뭇하게 보시던지, 할아버지가 아빠를 쓱 보더니, 한마디 했어요.


"이제 너는 이제 걱정 없겠다. 아무튼, 이 집에서 건강하고 하는 일 더 잘 되길 바라마."




아빠는 어린 내가 봐도 효자였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께 무엇을 특별히 많이 해드려서 효자가 아니고, 크고 작은 걱정을 끼치지 않았어요. 나도 자식을 둘 낳아보니, 바라는 것은 자식들의 '건강과 안녕'뿐,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재물이 따르는 것은 크게 바라지 않아요.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자주 연락드리는 편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찾아 뵐 때면, 그 누구보다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을 기쁘게 해 드렸어요. 항상 아빠는 할아버지댁에 갈 때마다, 할머니 안마를 해 주었어요.


"어머니, 이리로 좀 누워보세요."


무쇠 같은 두툼한 손으로, 얼마나 요물조물 전신을 주물러 대는지, 할머니는 안마 시작한 지 1분도 채 안돼,


"보현아, 그만해. 아고 시원해. 이제 그만해, 너 힘들어."


할머니는 다 큰 아들이 피곤한 온몸을 안마해주어 몸이 노곳노곳 해지는데도, 마음에 없는 말씀을 하였어요. 발부터, 다리, 등, 어깨, 마지막으로 두피 마사지까지 전신안마를 하고 나면 아빠의 이마에는 곳곳에 방울과 같은 땀이 맺혔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나도 그런 아빠를 따라 귤보다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 할머니 다리를 주물렀어요. 


"허허허, 우리 손자 손이 더 시원하구나. 우리 손자가 다 컸네, 이 할미 안마도 해주고."


아빠는 할아버지댁에 가면 쉬는 법이 없었어요. 농번기에 바쁜 할아버지 논밭일을 따라다니며, 농약도 치고 추수도 돕고, 밭도 맸어요. 어렸을 때부터 농촌에서 자라서 그런지, 아빠는 대부분의 논, 밭일에 능했어요. 그러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일손을 돕게 되었어요. 그 작은 아이가 얼마나 힘이 되었겠어요. 그래도,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주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아이고, 우리 주년이 없었으면 내일까지 할 일을, 우리 손자 덕분에 오늘 다 끝났다. 할아버지 내일 조금 쉴 수 있겠구나. 우리 손자 최고여!"


아빠는 할아버지 일손을 도울 때면, 무엇이든 설명을 아끼지 않았어요. 


"주년아, 이게 무언지 아니?"


"잘 모르겠어요. 처음 봤는데요?"


"이게 인삼이라는 거야. 금산은 인삼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단다. 삼계탕에도 넣어먹고, 뿌리째 갈아 마셔도 건강에 좋지. 5년, 7년 응축된 뿌리를 먹는데, 건강에 당연히 좋겠지?"


"네, 근데 너무 써서 못 먹겠어요!"


"하하하, 아빠도 어렸을 땐, 잘 못 먹었단다. 너도 크면 알아서 챙겨 먹게 될 거야, 허허"



아빠는 집안의 분위기 메이커였어요. 설, 추석 같은 명절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으로 온 형제, 친척들이 모일 때면, 아빠 특유의 재미난 유머가 빛을 발했어요. 하루는 할아버지 생신으로 모든 일가친척이 다 모였는데, 할아버지 생신 축하 노래를 부르고, 아빠가 갑자기, 


"뽀뽀해, 뽀뽀해!"를 연달아 외치자, 나머지 식구들도 연달아 외치기 시작했어요.


성화에 못 이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진한 뽀뽀를 남기고, 당신은 시뻘건 얼굴을 얻어가셨어요. 가끔가다가 가족행사에서 춤판이 벌어질 때면, 아빠는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세상에는 볼 수 없는 진귀한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나는 굉장히 내성적이었지만 손주들 댄스타임 때가 되면, 나도 아빠처럼 손주들 중에 가장 먼저 일어나서, 일명 '개다리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친척 어르신들은 배꼽이 달아나게 웃었고, 춤을 멋있게 잘 춘다며, 용돈도 두둑이 받았어요. 아빠는 위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빠, 큰고모, 그리고 막내고모, 작은 아빠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능력과 재주가 있었어요. 모일 때마다, 실컷 웃고 맛있는 음식을 해 먹고, 서로 기분 좋은 말만 해주니, 가족 행사가 내 어린 눈에도 매우 재밌게 보였어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가족의 모습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느꼈어요. 


할아버지 환갑잔치였어요. 댁 근처 호텔 연회장을 빌려, 근사한 장소에서 환갑잔치를 했어요. 식사를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자식, 손주들 하나씩 나와 큰절 올리고 덕담을 올렸어요. 그리고 2부로 이어진 행사에서 노래방 기계가 있어 돌아가며 노래를 하는데, 아빠가 노래 부르고 있던 할머니를 갑자기 업었어요. 할머니는 아빠 등에 업혀 노래 한가락을 신나게 뽑았어요. 내 결혼식에서 사회를 보던 친구의 요청에, 한복을 입은 장모님을 업고 한 바퀴 돈 적이 있는데, 한복이 매우 미끄러워서 업기가 힘들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아빠의 체력과 집중력(?)이 대단했던 거죠. 연회장에서 최고의 주인공은 할아버지 다음으로 아빠였어요. 트롯이며, 팝송이며, 댄스곡이며 사방을 누벼가며 흥을 즐겼어요. 그런 아빠를 보며, 모두 마음이 녹고 한층 더 할아버지 환갑잔치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었어요. 



아빠는 술 한잔 할 때면, 홀로 되신 할머니에게 가끔 전화를 했어요. 


"금기씨 (할머니 성함), 아들 보현이에유. 우리 절세미녀 금기씨, 오늘 엄청 보고 싶네요"


나는 어린 나이에 아빠가 줄곧 술주정을 하는 줄 알았어요. 수화기 너머 들리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웃음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어요. 


"허허허, 보현이, 그래. 나도 우리 아들 보고 잡다. 근데, 왜 그려 오늘. 술 마셨냐?"


"우리 아름다운 금기씨, 이 아들이 매우 매우 사랑합니다"


40이 넘은 아빠 목소리에는 애교가 가득했어요. 사회적 지위와, 가장의 타이틀을 철저히 벗어난 '아들-엄마'의 대화였어요.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그 누구에 의해 방해받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대화라는 것을 크고 나서 깨달았어요. 


가장의 무게와 하루하루 힘든 직장생활로 평소에 미쳐 신경 쓰지 못했던 부모님에 대한 죄송한 마음과 보고 싶은 그리움이 함께 묻어나는 '애교작전'이었어요. 


아빠는 할머니댁에 갈 때면, 빈손으로 갔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값비싼 선물보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선물을 항상 사갔어요. 읍내에 들러 닭이나 오리고기를 사서 직접 백숙을 해드리거나, 농수산 시장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잔뜩 사서 할머니댁에서 직접 요리를 해주었어요. 특급 요리사인 아빠는 할머니 입맛에 맞게 다양한 요리도 척척 해내었어요. 그런 아빠의 요리를 맛보고 할머니는,


"입맛에 아주 딱 맞다. 딱 알맞네."


말수가 적은 할머니도 아빠 요리에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짧은 시간 동안 할머니를 뵙고 집으로 다시 돌아올 때면, 아빠는 양팔을 머리 위로 큰 하트를 만들고는,


"금기씨, 사랑해요,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 


이렇게 말했어요. 그런 아빠를 보고 할머니는 항상 큰 웃음을 지었어요. 





할머니와 아빠


어릴 적 나는 할머니에 대한 아빠의 표현법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왜 아빠는 평범하게 행동하지 않을까? 할머니가 싫어하실 것 같은데.'


'왜 술만 먹으면 할머니에게 전화해서 저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저럴까.'


도무지 이해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아빠의 행동이 이해가게 됐어요. 




하루하루 힘든 가장의 삶을 살다가, 나의 근원이자 나를 언제나 격 없이 반겨주는 '엄마'에게, 돌아갈 수 없지만 돌아가고 싶은 아빠의 몸부림이었어요. 가족 먹여 살리느라 하루하루 전전긍긍하고, 사회적 성공을 위해 이리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엄마 목소리 한번 들으면, 예전 어렸을 때로 돌아가 편안함을 느끼는, 그런 나무 그늘 같은 느낌이라는 것을, 나는 조금 더 크고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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