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현우 Jun 22. 2015

파수꾼(Bleak Night, 2010)

지키려던 것을 겨누고 마는 미숙한 파수꾼들의 총구

파수꾼(Bleak Night, 2010)

감독 : 윤성현

출연 : 이제훈(기태 역), 서준영(동윤 역), 박정민(희준 역), 조성하(아버지 역), 등등

별점 : ★★★★

한 줄 평 : 지키려던 것을 겨누고 마는 미숙한 파수꾼들의 총구


※제 리뷰는 언제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읽으신다면 더 뜻 깊은 리뷰가 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날 밤의 산책은 그렇게 끝이 났다. 오랜만에 마신 술로 완전히 취해버린 그는 콧물 눈물을 다 쏟아내며 울었다. 기러기들이 외치듯이. 친구의 품에 안겨서 꺼이꺼이. 그녀 때문이었다. 그와 그녀도 아예 처음부터 서로 오해한다고 생각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해한다고, 서로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했다니...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 나오는 '그와 그녀'처럼 우리는 가끔, 아니 꽤 자주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완벽한 오해로 인해 서로를 잃는다. 윤성현 감독의 「파수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 그리고 그 간극에 함몰되어 서로를 잃어버리는 우리들에 대한 영화이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졸렬한 시기심 때문에, '나는 너와 다르다'는 오만함 때문에 서로를 때리고, 욕하고, 헐뜯는 우리들. 그렇게 서로를 잃고서야 뒤늦게 그 속좁음에 수치스러워하고, 미안해하고, 죄스러워하는 우리들. 그렇게 타인을 피하거나, 나를 죽이거나, 가끔 한 뼘 정도 성장하는 우리들. 그 연약하고 찌질한, 그러기에 더 영악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윤성현 감독은 세 고등학생의 이야기에 담아 관객에게 선보인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헷갈리는' 극의 전개와 두드러지는 소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윤성현 감독은 관객들로 하여금 스토리를 '잘못' 예측하게 만드는 구성을 취한다. 예를 들면, 극의 첫 장면에 급우들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하는 희준의 모습(물론 아직 '희준'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을 보여준 뒤, 그 뒤에 이어서 자살한 한 학생의 '아버지'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극을 이끌어간다. 이로 인해 관객은 당연히 자살한 학생이 기태가 아닌 희준이라고 추측하고, '아버지'를 '희준의 아버지'로 예측하게 된다. 하지만 관객은 이후에 자살한 아이가 희준이 아닌 기태라는 것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구타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자살을 하다니? 이렇게 관객을 '헷갈리게' 하는 극 전개를 통해 윤성현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실 윤성현 감독은 우리를 헷갈리게 하지 않았다. 우리가 헷갈린 것은 우리의 '오해와 편견' 때문이었다. 자살이라는 불행은 당연히 집단 구타의 피해자가 맞이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물론 그 생각을 감독이 유도한 건 맞지만, 윤성현 감독이 그 생각을 강요한 적은 없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에만 기대어 관객 스스로 '섣불리' 판단한 것이다. 윤성현 감독은 현재와 과거, 액자의 밖과 안을 넘나드는 구성을 통해 관객을 오해하게끔 유도한 뒤, 그 오해를 무너뜨린다. 우리는 극 속의 등장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오해와 편견으로 무너져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지만, 그 순간 우리들 자신 역시 그들에 대한 오해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은 두드러지는 소년성이다. 왜 감독은 굳이 '진정한 소통을 기반으로 한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말하기 위해 소년성을 빌려왔을까? 관객 누구나 경험했을 고등학교 시절을 가져와 공감대를 확보하려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실제로 영화의 장면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사실적이어서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학창시절에 대한 보편적인 향수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 뿐일까? 나는 윤성현 감독이 관계의 함몰을 가져오는 소통의 미숙함을, '일부러' 소년성에 기대어 설명함으로써, '관계 맺는 자로서의 성숙'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소년스러움과 어른스러움 중에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가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는 덮어두자.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소년스러움은 순수함보다는 미숙함에 가깝고, 이에 대척되는 지점에 어른스러움을 놓자면 그것은 성숙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소년이었고, 대부분의 우리는 아직도 '어릴 적의 우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말씨나 외양 같은 겉모습은 어른인 척 하고 있을지 몰라도 아직 우리의 내면은 아직 설익고, 찌질하며, 어리다. 하지만 소년은 자라며, 우리도 자란다. 


 특히 이 영화의 라스트신인 동윤의 회상(상상을 더한 회상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듯한데)에서 나타나는 동윤의 표정과 "그래, 너가 최고다."라는 동윤의 대사는 소년성의 탈피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동윤은 기태의 이야기를 끝까지, 주의 깊게 듣는다. 그리고 그의 철없음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래, 너가 최고다."라며 기태를 인정하고 수긍한다. 영화가 보여주는 마지막 소통에 회피, 침묵, 무시, 폭력, 낙인, 그리고 편견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소년들은 없다. 그들은 이제 오해의 바닥을 짚고 배려와 소통의 양지(陽地)로 올라선다. 이제 그들은 지키고 싶던 것을 지킬 수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불편하지만, 불편하지만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시(Poetry, 201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