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꽃이 되는 밤, 달 꽃이 환하게 피었다. 흰빛은 하늘을 물들이고 산하를 아우르며 세상 곳곳에 향기를 뿌린다. 물큰한 달의 향기다. 한해의 첫 보름인 음력 1월 15일, 상원(上元)이 밝았다. 반듯한 지붕 위를, 완만한 산등성이 위를, 푸르스름한 바다 위를 덮은 하얀 달의 속살이 어둠을 밝힌다. 달 속 이야기가 꽃으로 피는 밤, 정월 대보름이다.
수천 년 전부터 달의 신비는 사람들 가슴에 송이송이 꽃으로 깃들었다. 달을 향한 간절한 소망이었다. 온갖 사연을 털어놓고 싶은 갈망이 달을 신비의 영역으로 구체화했다. 새벽 묘시에 새뜻하게 떠 있는 초승달을 보며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둥그스름한 보름달 앞에 어찌 두 손을 모으지 않을 것인가. 그 마음들이 꽃이 되었다. 초승달이 상현달을 거쳐 보름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마음에도 꽃이 핀다. 보름달이 하현달과 그믐달로 기우는 것도 꽃의 속성과 같다. 피고 지는 달의 모습, 차오르고 사그라드는 자연의 이치다.
어릴 적, 수없이 달을 품었다. 산골의 밤은 칠흑 같았고 닭 울음소리만이 고요를 튕겼다. 초가를 덮은 박꽃처럼 순수하던 달빛은 아이들 눈에 비친 동화의 세계였다. 캄캄한 어둠을 즈려밟고 달은 마당까지 내려와 밤새 자신의 빛과 숨바꼭질을 했다. 문을 열면 왈칵 쏟아져 들어오던 달 꽃의 삽상한 향기, 그런 밤은 이슥토록 잠이 오지 않았다. 달이 심어준 온갖 상상이 자라나 소녀의 감성으로 이어졌다. 이후 사랑하고 이별할 때도 달 꽃은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웃음과 눈물을 거쳐 어머니의 달 밝은 밤 정화수를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월 대보름의 정답고 따뜻했던 기억은 이제 마트의 부럼과 나물에서 만난다. 떠들썩하게 이어지던 세시풍속도 관념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달만은 여전하다. 달빛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과 친구들의 환한 웃음을 본다. 보름달이 피워낸 아름다운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