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들은 삶을 곧게 펴 말간 생명을 잉태하는 곳
개울과 논 사이에 샘이 있었다. 바가지로 물을 뜰 수 있는 둥글고 낮은 샘이었다. 샘에서 흘러나온 물은 길을 만들어 개울의 품에 안겼다. 물길 옆으로는 커다랗고 밋밋한 돌이 두어 개 있었다. 돌은 빨래판 용도였다. 샘을 빙 둘러 흙으로 쌓은 울타리에는 키 작은 꽃과 잡초가 어깨를 겯고 방그레 웃었다. 봄이면 나비가, 가을에는 잠자리가 샘 위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잠자리뿐만이 아니었다. 구름도 샘물에서 거울놀이를 하고, 바람도 쉬어 갔다. 해도, 달도, 별도, 나무도 샘물에 풍덩 발을 담갔다. 사람들은 샘에서 물을 마시고 세수를 했다. 빨래하고 등목도 했다. 쌀을 씻고 푸성귀를 헹궜다. 자랑하고 푸념하기에 샘은 좋은 장소였다. 눈물과 웃음을 풀어놓기에도 그만이었다.
샘은 세상의 소리를, 냄새를 다 받아들였다. 그리고 조금씩 흘려보냈다. 세상에서 들어온 온갖 것들을 정화해 다시 내보냈다. 고여 있으나 열려 있었다. 졸졸졸 쉼 없이 흘러 상생과 소멸을 반복했다. 가뭄이면 샘도 물길의 몸피가 야위었다. 간혹 뚝 끊긴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물은 차올랐다. 채움과 동시에 흘려보내야 할 숙명을 타고 난 게 샘이었다. 찌들은 삶을 곧게 펴 말간 생명을 잉태하는 곳이었다.
어린 시절, 물동이를 이고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찾아간 샘은 신비하고 고요했다. 물소리는 생기로웠고 물맛은 달았다. 샘에 바가지를 넣으면 챙챙, 상쾌한 소리가 났다. 퍼내도 다시 차오르던 물, 아마도 그때부터 내 가슴속에는 글쓰기의 싹이 움을 틔운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샘에는 소소한 것들 천지였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소박함이 깃들어 있었다. 온갖 더러움도 거부하지 않던 샘은 그것들을 맑게 헹궈 빛나게 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샘 하나를 두었다. 그 후 오염되고 때 묻은 감정을 씻기 위해 마음 샘에 바가지를 띄우는 날이 많아졌다. 생각 샘도 둥근 샘처럼 채움과 비움을 반복했다. 유난히 삶이 비틀거리고 헝클어진 날에는 유년 시절 샘이 생각난다. 그 샘에는 아직도 어린 내가 샘물에 얼굴을 비추며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