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리카 Erika Mar 18. 2023

반란분자, 여왕벌, 그리고 괴물

대한민국 문과생, 캐나다 직장인으로 살아남기 <7>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내 귀를 의심했다. 회사 분위기가 극도로 나빠진 게 내가 직원들을 선동하고 부추겼기 때문이란다. 


 이외의 곳에서 '선동'이라는 단어를 듣는 건 참 오랜만이라 뇌에 심각한 버퍼링이 걸렸다. '다른 XX 직원이 그렇게 말하더라'며 남 깎아내리기, 거짓말과 이간질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래, 회사 역사상 그녀에게 저 화법에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빠지면 서운하지. 지금껏 그만둔 모든 사람들이 퇴사 이유 1순위를 저로 꼽은 것을 그녀와 대표는 아마 평생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간 주 요지는 '직원끼리 모여서 회사 험담하지 말라'라는 것이었다. 동료 말을 믿지 말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마치 저만 빼고 반란을 위한 작당이라도 모의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회사의 부적절한 매니지먼트로 여럿 말이 나올 때마다 오히려 팀원들을 독려하고 달래 가며 여기까지 온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회사가 바쁠수록 가장 많은 수혜를 입는 그녀가 과도한 업무로 나빠진 직원들의 건강, 적은 보상과 복지 등의 문제를 이해할리는 만무했지만, 적어도 나를 이렇게 비겁하게 불러내어 쏘아붙이지는 말았어야 했다. 말로만 듣던 '좋소'기업의 만행을 캐나다에서 너무나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년씩이나 일하는 동안 그녀가 그런 사람인 걸 몰랐느냐 묻는다면, 물론 알았다. 당연히 그녀는 처음부터 그랬다. 아니 처음엔 사실 더 심했다 (정말이다). 이곳에 차마 다 풀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리라). 하지만 내가 일을 잘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태도가 놀라울 만큼 변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사는 내가 대견하고 안쓰럽다면서 내게 잘해주는 일도 많았다. 그럴 만도 했다. 다들 그녀의 패악질에 금세 그만두는데, 가장 오래 버티며 저에게 부를 가져다주었으니...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 실은 그녀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여전히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군다는 것도, 거짓말이 일상이란 것도, 그러곤 클라이언트들과 거래처에겐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온갖 위선적인 행동을 일삼는다는 것도. 회사는 열심히 감추려고 하지만, 누가 봐도 그녀는 이곳의 여왕벌이었다.


아주 초반에는 회사에 피드백을 한 적도 있었다. 대표 눈치를 보느라 누구도 제대로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참다 참다 용기를 내어 그녀의 만행 중 극히 일부를 전달했다. 하지만 대표의 최측근인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약간의 주의만 들었을 뿐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고자질을 했으니 내게 더 못되게 굴었다.


이전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매일 그만둘 생각을 했다. 근데 너무 억울했다. 입사 두어 달이 경력이 될 리 만무했고 다시 막 졸업한 구직자의 신분이 되어야 한다. 애매하게 배우다 만 일들도 찜찜했다. 지금 그만두면 뭐가 남기는커녕 최저시급이나 받으며 얻은 스트레스, 시간, 감정소모, 체력 등 잃는 게 더 많았다. 매일밤 울며 생각했다. 도저히 억울해서 뭐 하나는 남겨가야 했다. 


그러려면 "내가" 바뀌어야 했다. 이 "여왕벌"과 공생하기 위해선. 그래, 한국식 마인드로 보면 나이건 직위건 손윗사람이다. 무조건 참아내자. 그렇게  닫고 눈 감고 일만 했다. 집에 오면 한국의 엄마와 전화통을 붙잡고 울었다. 다음날은 부은 눈을 감추고 다시 세상 상냥하게 웃으며 사무실에 들어섰다.


그녀는 속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라, 내가 저 비위를 맞추기 시작하자 반색하며 나를 '자기 사람'으로 길들이기 위한 작업에 열을 올렸다. 그녀는 늘 자신이 얼마나 순수하고 계산이 없는지를(묻지도 않았는데) 설명했다. 어쩜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냥 예의가 없는 건데 매번 스스로는 뒤끝 없고 쿨하다고 착각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점점 판단력을 잃어갔다. 그녀가 베푸는 호의는 속이 훤했지만, 그녀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라고 합리화하며 그것들을 모른척하고 받았다. 이제 나를 괴롭히지 않으니 괜찮다는 생각도 하면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니체는 이런 말을 남겼다. 허를 찌르는 통찰이다.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괴물이 되기를 자처했다는 것을. 


그런데, 정말 그녀가 괴물이었을까? 그건 오랫동안 이어진 나의 가장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틀렸다. 그녀는 여왕벌일 뿐이다."진짜 괴물"은 따로 있다. 그녀가 그렇게 제멋대로 활개를  수 있게 내버려 둘 수 있는 "진짜". 모든 걸 알면서도 모른척하며 그녀를 방패막이, 욕받이 삼아 뒤에서 그들에게 잠식되어 가는  흐뭇하게 지켜보던.


처절하고 쪽팔리는 자기반성의 시간이 이어졌다. 

괴물이 되기 전으로 돌아가기엔 늦었지만, 케이지는 부숴버려야 했다.




거의 매일 아침, 기업들과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적어도 서류(이력서)는 대부분 통과하는 모양이었다. 로펌뿐 아니라 다른 산업의 기업에서도 관심을 나타냈다. 나를 찾는 곳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기쁘고 감사했다.


참고로 내 경력이 기업이 요구하는 만큼 미치지 못하더라도 업무에 자신이 있다면 얼마든지 지원해도 된다. 예를 들어 본인이 햇수로는 3년의 경력밖에 없는데, 기업은 5년 이상의 경력을 요구하는 경우라도, 그들이 필요한 경험과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지원할 수 있다. 3년이니 5년이니 하는 숫자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내 실제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게 중요하다. 기업이 후보자에게 궁금한 것은 몇 년을 자리에 앉아 있었느냐보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일 것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대부분 내 실제 경력보다 많은 경력을 요구하는 곳들에 지원을 했고, 문제없이 서류를 통과했다. 여태 해 온 업무량이 타 회사 기준으론 내 실제 경력의 최소 두 배쯤은 될 거라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고 싶었다. 후보자의 경력이 길다고 능력이 보장되는 것은 아닌 데다 관련 직무에 얼마큼 지식이 있는지, 어떤 일을 다룰 수 있는지 쯤은 인터뷰 때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다. 그러니 내가 현재까지 해 오고 있는 업무에 대해 최대한 구체하고 세세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한다. 일을 하는 건 익숙한 일상이 되었어도 막상 모든 과정을 세부적으로 묘사하는 건 절대 쉽지 않다. 


경력이 모자란데도 지원할 경우, 오히려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플러스가 될 수도 있다 (물론 뻥카가 아니라는 가정 하에). 북미에서는 자신감 있는 태도가 정말 정말 정말 x100 중요한데, 겸손하고 소극적인(수줍은) 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차피 밑져야 본전, 인터뷰를 하게 되면 잘하든 못하든 다 연습이고 좋은 경험이니 1-2년 정도 모자란 경력 때문에 지원을 포기하지는 않길 바란다.  


약속된 인터뷰 시간이 다가오면 긴장감을 감당할 수 없어 그냥 도망가버릴까 수도 없이 생각했다. 인터뷰가 시작되면 바보같이 어버버거리기 일쑤였고,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매번 인터뷰가 끝날 때마다 시야가 넓어지는 게 느껴졌다. 영어/인터뷰 스킬이 향상되는 건 물론이고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회사들을 잠깐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것도 큰 경험이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평생 우물 밖을 나와보지 못하는 개구리로 살았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들의 후보자였지만, 그들 역시 나의 후보자였다.



                    

이전 06화 첫 이직 오퍼를 받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