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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Erika Mar 21. 2023

카운터오퍼(Counter Offer)의 함정

대한민국 문과생, 캐나다 직장인으로 살아남기 <8>


이직에 관한 생각은 회사에 관련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시도해 볼까 말까 갈팡질팡한 상태이거나, 회사를 물색하고 있거나, 이미 인터뷰를 보고 있거나, 그 어떤 상태이든지 절대 알리지 말 것. 회사에 알릴 땐 이직이 아주 확정되고 나서, "떠나겠다"를 공표할 때뿐이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만약 회사가 이 "발칙한" 생각이나 계획을 먼저 알게 되면, 늦어도 수일 이내, 빠르면 그 자리에서 당신을 해고할 가능성이 크다. 당장 해고하지 않더라도 당신을 눈에 띄게 차별하기 시작해서 프로젝트나 중요한 업무 방향 등을 논의/결정할 때 어느새 당신은 배제되어 있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회사 입장에선 "어차피 갈 사람", "이미 마음이 뜬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직 정해진 게 아니라고 해명하더라도 한 번 이직에 대한 마음을 들킨(?) 이상 이 이미지는 바뀌기가 힘들다. 일단 마음이 떠난 사람을 붙잡기 위해 드는 비용보다 새로운 대체자를 찾는 비용이 더 싸게 먹히기 때문에, 붙잡기보단 매우 차갑게 돌변한다. 또한 이미 다른 회사들과 접촉했을 것으로 본다면, 회사의 자료나 고객을 빼돌릴 가능성도 있어 보안상 굉장히 위험하다. 회사 입장에선 하루빨리 내보내야 할 명분이 충분하다.


그러니 정말 이직할 맘도 없고, 다른 곳에서 오퍼를 받지도 않았으면서 회사에 불만이 있다고 어쭙잖게 이직으로 겁박할 생각은 감히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스스로는 내가 이 회사의 핵심인재라고 믿고 있을지언정 세상엔 나의 대체제가 차고 넘친다.   


반면 이직이 확정되고 퇴사를 알리게 될 경우, 보통은 퇴사 일정을 조율하고 인수인계를 위한 업무 마무리를 하게 된다. 온타리오주의 경우 퇴사 희망일 2주 전에만 회사에 알리면 된다.


회사가 기존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며 "카운터 오퍼"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매우 심사숙고해야 한다. 각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지만, 대부분의 경험자 및 커리어 전문가들이 카운터 오퍼는 어지간하면 받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그 이유는,


1. 이직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만큼 여태 부려먹다가 퇴사한다고 하니 더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말은 무엇이겠는가. 진작 더 대우해 줄 수 있는 거였는데 말 안 하니 그냥 싸게 굴려먹었단 소리다. 더 이상 호구되지 말자.


2. 내가 가진 업무 불만이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 내부의 핵심 인사들이 모조리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지 않는 이상, 회사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바뀌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좋은 대우를 해 준다는 이유로, 더 많은 업무와 책임을 떠맡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회사가 아무리 약속한들, 기존에 하던 일이 줄어들 가능성은 정말 희박하다. 회사가 작정하고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일은 결국 익숙한 사람, 일처리가 빠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


3. 기존 회사가 아무리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들, 다른 회사가 제시하는 조건보다 좋은 경우는 거의 없다.


정도로 크게 볼 수 있다. 더 자세한 건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많은 커리어 전문가들이 쓰신 글들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회사와 면담이 시작되었다. 여전히 다들 일에 치여 면담 스케줄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내가 가장 먼저 억지로 시간을 구겨 넣었다. 그때까지도 난 환경이 개선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이야기는 꼭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로 꼽혀온 과중 업무는 개인별로 업무량을 정해서 그 이상이 되면 외부에 맡기는 방법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외부에 맡긴 일도 그 일의 절반은 사실상 다 기존 직원이 해야 하는 걸 이미 겪어온 터라 회의적으로 다가왔다. 업무량을 정하는 기준도 모호했다. 이미 수개월 동안 한 사람이 기본 2명 이상의 일을 쳐내고 있는 판국이었지만, 회사는 애초에 그 사실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듯했다. 매니저의 태도 문제는 터놓고 얘기할 수도 없었고 다른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온갖 잡일도 빼놓고 이야길 했다.


행정 업무만이라도 줄일 수 있도록 행정직원을 보충해 달라고 수없이 요청했지만 황당한 이유를 들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애초에 행정직을 구하지도 않았으면서 새로 온 직원에게 행정업무만 시키는 게 미안하다는(???) 저세상 논리를 펼쳤다. 뭐 이유야 뻔했다. 행정업무만을 위한 직원을 구하기엔 인건비가 아까워 그러질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간 단 한 번도 연봉을 협상하거나 대우를 더 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남들은 나를 병신 호구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겐 당장 연봉보다 중요한 건 회사 오너가 가진 비즈니스 가치관과 방향이었다. 그게 맞아야 다른 조건들을 맞춰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적인 관점일지 모르지만, 내겐 스스로가 고객이 되어도 괜찮은, 양심적이고 건강한 회사에 속해 있다는 자부심을 갖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한때는 그런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기계처럼 일을 해야 했고, 대가는 정당하게 배분되지 않았으며, 매니저가 손님 뒤에서 행하고 있는 짓들은 늘 양심을 짓눌렀다.


회사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기대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속 시원히 이곳을 떠나겠다는 결심도 서지 않았다. 강한 허무함이 밀려왔다. 내가 애정했던 회사는 고집불통 좋소기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심신이 너무 지쳤다. 이직이고 뭐고 쉬고 싶었다. 나는 오퍼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다른 곳에서도 나를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대표는 내게 기존 연봉에서 18%가량을 인상해 줄 테니 새로운 관리직을 맡을 것을 제안했다. 여러 복지도 약속했다. 회사로서는 유래 없이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만큼 나를 고려할 대상으로 여긴다는 사실은 다행이었고 감사했다. 그래도 내가 일을 못하지는 않았나 보다 싶었다.


연봉 18% 인상은 언뜻 커 보였지만, 다른 곳에서는 기본 25% 이상 인상된 금액으로 제안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할만한 대상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이 회사에 가졌던 애정, 욕심, 익숙해진 환경에서 오는 편안함과 지금껏 다져온 나의 입지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카운터 오퍼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무수히 많은 이직 전문가들과 사회 선배들의 조언을 들어왔지만 막상 내 이야기가 되니 미친 척 한 번 더 속아볼까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시간을 달라고 했다. 몇 주 휴가를 다녀오고 싶다 말했다. 너무 지쳐서 쉬면서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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