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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Erika Apr 01. 2023

노예는 해방이 두렵다

대한민국 문과생, 캐나다 직장인으로 살아남기 <9>



휴가 동안에도 잡 서칭은 멈출 수 없었고 많은 인터뷰 일정이 있었다. 맘 같아선 다 때려치우고 진짜 놀고먹고 싶었지만, 다달이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은 다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게 현대 직장인들의 현실 아니겠는가. 오퍼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데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이러다 인터뷰 요청이 언제 뚝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닥치는 대로 인터뷰를 수락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이미 10월을 지나고 있었고, 연말에는 거의 구인구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에서는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상시로 채용을 하지만, 대부분의 회사는 7-8월, 12월-1월 초까지는 구인을 거의 하지 않는다. 여름에는 다들 여름휴가를, 연말엔 겨울 휴가를 떠나버리기 때문이다. 휴가를 최소 일주일에서 몇 주씩이나 훅 떠나버리는 캐나다의 직장인 문화 특성상 이 기간에는 고용시장이 차분해지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니까 이직을 할 것이라면 적어도 11월 안으로는 새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그 와중에 처음으로 받았던 대형 로펌의 오퍼는 끝내 거절하게 되었다. 기껏 많은 인터뷰를 보고 힘들게 얻은 기회를 놓으려니 아쉽긴 했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했을 때 현재 내 상황에 적합한 옵션 같지는 않았다. 일단 집에서 너무 멀다는 게 치명적인 결점으로 다가왔다. 당장 자동차를 구입해서 출퇴근을 할 만큼의 좋은 기회라고는 설득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덕분에 내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으니, 더 적합한 곳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동시에 여러 곳의 오퍼를 두고 저울질을 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오퍼를 거절할 땐 정말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다. 대게는 인터뷰를 본 다른 곳에서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며칠에서 몇 주 안으로 이 오퍼를 받아들일지 포기할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퍼를 줬다고 그들이 무한정 나를 기다려주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도 대기하고 있는 후보자들이 있다.  (내가 몇 번째 후보였는지 알기는 힘들지만, 보통 파이널 인터뷰를 보고도 한참이나 늦게 연락이 왔다면 앞선 후보들이 오퍼를 거절했기 때문에 내게 차례가 왔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퇴사에 대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우유부단하다고 욕을 퍼부어도 좋다. 회사의 카운터오퍼 또한 매우 신중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어리에 현 회사에 남아야 하는 이유 / 이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이 날 때마다 써내려 갔다. 아주 사소한 이유들까지도 다 썼다. 예를 들면 현 직장에 남아야 하는 이유에는 많은 간편식/간식이 제공된다는 점도 있었고, 떠나야 하는 이유에는 출퇴근 시 버스 정류장까지 꽤 많이 걸어야 한다는 점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법한 일이어도 나에겐 조금이라도 신경 쓰인다면 모두 썼다.


이직을 하게 되면 연봉면에서는 무조건 점프를 하게 될 것은 확실해 보였지만, 현 회사에서 겪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는 보장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나쁜 환경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더 나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현 회사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건 사실 거의 예측 가능한 현실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답답한 마음에 2주간 휴가를 내어버리긴 했지만, 계획도 딱히 없었고 그렇다고 편히 쉴 수도 없었다. 사회생활 선배인 남자친구가 곁에서 많은 힘이 되었다. 비록 내가 이직을 결정하지 않은 채 회사에 상황을 이실직고해 버린 것은 그의 충고에는 반하는 일이긴 했지만, 내가 마주하는 과정 하나하나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지켜보던 남자친구가 기분 전환 겸 단풍구경을 다녀오자고 했다. "단풍국" 거주자란 사실이 무색하게 나는 그간 단풍구경 한 번 가보지 못했다. 학생 때는 학업 따라가느라 공부에 치여서, 직장인이 된 지금은 단풍이 지는지 눈이 오는지 알아챌 겨를 없이 일에 치여 사느라 계절의 변화도 실감할 새가 없었던 것이다. 토론토를 한참 벗어난 북쪽에서 형형색색의 단풍에 둘러싸이는 기분은 황홀했다. 복잡한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이직을 하지 않고 회사에 머무른다면 나는 아마 더 많은 총애를 받고 그 안에서 가능한 최대의 대우를 받으며 나름의 명성과 권위를 얻을 것이 꽤 보장되었다. 그뿐인가. 이미 너무 익숙한 내 책상과 물건들로, 너무 익숙한 시스템대로 일을 해 나가면 된다. 새로 배우고 익히는 수고로움은 들지 않을 것이다. 상사와 동료들을 새로 파악하고 익숙해지기 위해 에너지를 쓸 일도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커리어가 발전하기 어려운 환경을 택하기에는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다. 이 작은 회사에서 주어진 일이야 어렵지 않게 쳐내지만, 그게 전부였다. 우물 안에 갇혀 있다는 걸 깨닫고도 우물 안에 남기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설득되지 않는 회사운영 방식과 시스템을 모른척하고 지내는 것은 죄스럽기까지 했다. 익숙한 직장을 떠나 마주하게 될 새로운 환경과 그곳에서 헤쳐나갈 길을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은, 혼자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올 때보다도 더, 아니 사실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큰 두려움을 주었다 (아예 모르니 무식했던 그때는 차라리 나았다). 그래도 용기를 내야만 했다.  


단풍 구경을 하고 돌아온 늦은 저녁, 회사 이메일을 열고 Letter of resignation, 사직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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