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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Erika Apr 13. 2023

그래서, 이직하면 좋나요?

대한민국 문과생, 캐나다 직장인으로 살아남기 <에필로그>


결론부터 말하면, 좋다. 이 정도로 좋을 줄 몰랐다.


회사를 나올 땐 맘이 마냥 편치는 않았는데 웬걸, 더 망설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을 만큼 이직 후 삶의 질은 놀랍도록 향상되었다. 지레 겁을 먹고 그리 걱정했던 날들이 머쓱할 정도다. 십수 년간 부산과 서울,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스스로 변화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름 정착을 했다고 생각한 이후에는 나도 모르게 변화가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직이란 경험을 통해 다음에도 언젠가 비슷한 고민이 생긴다면 당황하지 않고 신중히 생각하고 준비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 삼십여 년 인생동안 가장 잘한 일 중 한 가지에 '이직'이 포함될 수 있겠다.


이직 후 전과 비교해 가장 좋은 점 몇 가지 만을 소개해본다. 참고로 이는 '현 회사 찬양'이 아닌, 조금씩 발전하는 스스로에 대한 기록의 일부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내 여러 자아 중 하나일 뿐이니까. 이직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취는 '변화를 즐기고, 또 그것에 언제든 준비되어 있고 싶다'는 깨달음이었다.



1. 연봉과 복지

 

직무 변경과 같은 이유로 기존보다 연봉이나 복지가 하향된 곳으로 이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이직에 따른 스트레스와 리스크가 큰 만큼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한데, 훌쩍 뛴 연봉이 그중 가장 첫 번째다.


내 경우 이직을 결심한 이유가 단순히 적은 급여나 복지 때문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전보다 20% 이상은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기존 회사에서 약 18%의 연봉 인상을 카운터 오퍼로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환경 변화의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보다 적게는 타협할 이유가 없었고, 내 직무와 연차가 받을 수 있는 연봉을 조사하고 비교했을 때, 내 커리어로 그 정도는 받을 수 있겠다는 자신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직 후 연봉은 20%가 훨씬 넘게 인상되었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복지 혜택까지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연봉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성적표가 따로 없는 사회생활에서 연봉은 내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다. 회사로부터 얼마큼 인정받는지를 (최소한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서류가 (나에 대한 처우가 약속된) 잡 오퍼나 근로 계약서이기 때문이다. 명시된 연봉과 복지는 기본으로 보장하되, 그 외 추가적으로 회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본인에게 달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근로자 또한 내가 할 임무나 지켜야 할 조건들을 회사에 보장해 주어야 한다. 모든 약속은 연인관계가 아닌 이상 '알아서 잘해줄게'식이 아니라, 문서로 증빙이 가능하도록 남기는 게 좋다. 사람은 떠나도 서류는 남는다지 않는가.

 

2. 커리어의 성장 가능성 - 회사의 사업 규모

 

내가 느낀 이전 회사에서의 문제점 중 하나는 커리어의 성장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었다. 2-3년 차까지만 하더라도 일을 하나하나 처리할 때마다 배우는 게 많았다. 새하얀 백지인 신입사원에게 채울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게다가 지금 생각해 봐도 업무량이 엄청났으니, 폭발적으로 성장을 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겠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다녔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더니, 어느 날부터는 더 이상 지금 이상으로 성장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작은 회사다 보니 사업 규모가 한정되어 있어서 커리어가 확장되지 않았고 업무 외 개인적인 자기 계발도 어느 순간 정체되었다. 사실 많은 일을 빠르게 잘 해내게 되면서, 회사에서 눈치 볼 사람도 없어지니 편한 점도 많았다. 상사들로부터 두터운 신임도 얻고 있던 터라 그냥 지금처럼 쭈욱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동안 해치우기 급급했던 일들에 의문점들이 생겨나면서, 업무에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진 노련하고 전문적인 선배나 상사가 없는 환경이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이전에 다뤄보지 않았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회사 내부에서 조언하고 가이드해 줄 사람이 없어 외부에서 혼자 찾고 해결하는 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회사가 많은 일을 잘못 처리해 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회사는 그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보고를 해도 크게 개선의 의지가 없었다. 아직 문제가 터지지 않았으니 괜찮지 않냐는 식이었다. (안전 불감증)


궁금증은 삼키고 그냥 지금처럼 늘 해오던 일을 하면 그만이었지만, 문득 급격한 위기감이 들었다. 과연 이 일을 내가 제대로 이해하며 배우고 있나? 이제 서른을 갓 넘긴 입사 3-4년 차, 아직 갈 길이 구만리인 내게 커리어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은 중요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업무를 확장시키고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 필요하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전문가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곳을 선택했다.


매일 존경할만한 동료/선배/상사들과 함께 커리어를 확장하고 그들로부터 배우는 기회를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하다. 환경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런데 아마 처음부터 큰 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면 이런 기쁨은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아무리 훌륭한 팀에 있어도 내가 '훌륭함'을 알아볼 만큼 성장해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테니까.


3. 업무의 분업화


이전 회사에서는 혼자 처리해야 했던 일들이 이직 후에는 체계적으로 분업화가 되어 있어 절대적인 업무량이 엄청나게 줄어들게 되었다. 이전엔 작은 회사라 어쩔 수 없었다지만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작 내가 해야 하는 서류 검토에 시간을 쏟지 못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많았다. 이직 후 내가 신경 쓸 일들이 절반 이상으로 줄어들면서, 대신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더 꼼꼼하고 자세히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기존에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했던 경험은 귀하다. A부터 Z까지 전부 스스로 해 보았기 때문에 분업화가 된 큰 기업에 와서도 전반적인 프로세스를 모두 이해하고 있고, 프로젝트를 맡을 때마다 전체적인 큰 그림이 쉽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사내 다른 부서나 팀원의 일들을 대충 알고 있는 덕분에 그들과 협업이 필요할 때에도 훨씬 쉽고 빠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4. 사라진 마이크로매니징


큰 기업으로 이직 후, 기존 회사와의 눈에 띄는 차이점은 회사의 기본 매뉴얼은 매우 분명하고 엄격한 반면, 업무 방식을 포함한 그 외의 것들은 놀랍도록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필요하면 재택/원격 근무를 할 수 있었고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내 업무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커다란 틀 안에서 '알아서'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 많은 직원을 모두 사소하게 관리한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또 그럴 필요가 없다. 덕분에 근무 피로감이 무척 줄어들었다.


반면 이전 회사는 정 반대였다. 기본 매뉴얼이 없어 일은 중구난방으로 진행되기 일쑤인데 다른 불필요한 룰은 많았다. 사실 기업일수록 마이크로매니징이 늘어나기가 쉬운건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 특히 회사에 충분한 인력이 없을 경우, 서로의 스케줄이나 업무를 대부분 알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덜 바쁜 직원에게 하나라도 (잡) 일을 더 주기 바쁘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 이전 회사를 포함하여 마이크로매니징을 하는 회사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이 마이크로매니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당하는(?) 나도 몰랐으니 말이다. 떠나보니 정말 잘 보인다. 커리어를 작은 회사에서 시작한다면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할 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작은 기업들도 많다.


5. 사라진 야근, 늘어난 개인시간


물론 같은 업계여도 회사마다 업무량은 천차만별이니 반드시 야근이 없다고 더 좋은 회사는 아니다. 하지만 수년간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주말에도 일을 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내겐 매우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야근은 전혀 없고, 심지어 당일 꼭 필요한 업무는 아침 몇 시간만 바짝 하면 끝나는 날이 대부분이다. 그럼 내 남은 근무시간은 낭비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서류를 꼼꼼하게 살펴볼 시간이 생기니 업무의 정확도가 올랐다. 이전에는 매일 일이 밀려있으니 그저 처리하기에 급급했다. 이젠 필요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고, 회사 내의 다양한 선배/동료/변호사들에게 조언도 구하며,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한 후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업무에 대해 더 정확하게 배울 수 있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시간이 늘어나니 다양한 자기 계발이 가능해졌다. 취미생활이나 운동과 같은 개인적인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되었다. 회사 일 이외에 그동안 생각만 해왔던 나만의 프로젝트 계획/실행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일에 치이지 않으니 육체/정신적으로 건강해지고, 덕북에 회사에서 더 활기차고 적극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된 건 말할 것도 없다. 직원 개인이 행복해야 회사도 성장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더라.







나는 이직이 확정되고도 큰 기대가 없었다. 심신이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른 연봉과 복지, 회사의 규모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만 성과라고 생각했다. 업무량에는 원체 단련이 되어 있어서 혹 이전만큼 혹은 그보다 심하다고 해도 견딜 자신이 있었다. 아니 사실 영 분위기가 안 맞으면 또 옮길 배짱도 있었다. 감사하게도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다.


직장 생활이 힘든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이직이 답일리는 (당연히) 없다. 아무리 한국보다 고용시장이 유연한 캐나다라고 한들, 이직의 결과가 득이 될지 독이 될지도 알 수 없는 데다 이력서 작성부터 지원, 인터뷰까지 모든 과정이 매우 험난 한 건 동서를 막론하고 같다. 아니, 애초에 내 커리어에 불러주는 곳이나 있을까나 싶다. 나 역시도 완전한 이직이 결정되기까지 '험난했다'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몸도 마음도 몹시 지치는 날을 몇 개월씩이나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을 용기 내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일 거다.  


그럼에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도전을 마주해야 할 때를 맞는다. 지금 만족하는 직장을 다니고 있더라도 언제 자신 혹은 회사에게 갑작스러운 변화가 찾아오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사업을 하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거지 같은 환경에 처했다면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곳으로 탈출각을 엿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불평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한탄도 불평도 허락되지 않는다. 억울하긴 하지만 현 직장을 택한 건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냉정하게 자기를 객관화해 보고, 그리고 오늘, 이 순간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할 수 있다면 해보자.


성공적인 이직 후에도, 나는 여전히 변화를 준비한다. 이것이 끝이 아닐 테니까. 자의든 타의든, 언젠가 분명히 도전을 마주해야 할 날이 또 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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