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리카 Erika
Apr 25. 2023
'아무 회사나 가지 말라'는 조언은 대체적으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 회사'의 기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 수년~수십 년의 커리어를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중대한 결정인만큼 첫 단추는 중요하다. 하지만 학교를 갓 졸업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면, 대게는 어딜 골라서 갈 처지가 못된다. 처음 구직을 시작할 땐 나름대로 합리적인 기준을 세우지만 구직 기간이 길어질수록 기준은 점점 낮아진다. 그러다 결국 '아무 회사'로 타깃이 바뀌곤 한다. 닥치는 대로 지원을 하고, 불러주는 곳이 있기를 기도하게 된다. 어디라도 연락이 오면 출근을 한다.
이는 '아무 회사나 가지 말라'는 조언에는 위배되는 행동이지만, 결코 잘못된 행동은 아니다. 더 다양한 기회에 가능성을 열어둔 훌륭한 결정이다. 첫 단추는 중요하지만, '첫 출근'이 꼭 '첫 단추'가 되는 건 아니다. 첫 단추를 끼워볼 만한 곳인가를 보기 위해 첫 출근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겁내지 않아도 된다. 불러주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자신감이나 얻고, 까짓 거 한 번 출근해 본다고 그렇게 손해 볼 일도 없다. 마냥 길어지는 구직 기간은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물론 입사 지원 과정에서 회사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엿보는 굵직한 필터링은 필요하다. 지원 과정부터 고용주가 매우 무성의하고 면접 시 기본적인 예의가 없거나 무례했다면, 높은 확률로 걸러야 할 기업이라는 데는 반박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기업은 드물고, 결국 출근을 해 보아야 이곳에서 커리어를 잘 쌓아나갈 수 있을 것인가도 판단해 볼 만한 근거가 생긴다. 회사를 보는 눈이 전혀 생기지 않은 이 시기에는 이러한 '찍먹'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첫 단추를 끼울 때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전체적인 흐름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곳인지'를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현실 사이에는 차이가 커서, 신입일수록 그 과정을 최대한 자세히 볼 수 있는 곳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산업이든 실제 현장에서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수십, 수백 개의 사람들과 프로세싱이 수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당장 맡은 일이 복사나 스캔 같은 허드렛일이더라도 자꾸 큰 흐름, 비즈니스의 숲을 보려고 애써야 한다. 그래야 내게 관련 기회가 주어졌을 때 처음이라고 당황하는 정도가 그나마 줄어들 수 있고, 다른 회사로 가더라도 조금이나마 '아는 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바라는 '크고 좋은 회사'가 고용할 수 있는 신입 사원의 수는 시장에 나온 구직자들에 비해 턱없이 적다. 기껏해야 1% 될까? 모두가 '그럴듯해 보이는' 곳에서 일을 시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길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내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것일까 고민하고 행동한다면 모든 경험이 귀하지 않을까.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경험일지라도 일단 경험했다면 남는 건 있다. 하물며 이런 곳에서는 일하지 않도록 해야겠구나 하고 느끼는 것 조차도 하나의 배움이다. 회사를 보는 눈도 조금 생긴다. 어차피 단추는 꿰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