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전 내가 한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다른 곳도 다 비슷하겠지' 란 생각이었다. 더 바쁘고 덜 바쁘고의 차이가 있을 뿐,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고 같은 업계, 같은 분야라면 같은 방식으로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익숙한 곳에서 안주하고 싶은 내 게으름의 좋은 핑계가 되곤 했다.
머지않아 이 건방진 착각은 이직을 하면서 보기 좋게 박살이 났다. 물론 이직을 시도하게 된 많은 이유 중에 '정말 다른 회사도 이런 식으로 일을 할까' 싶은 의심과 호기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했지만, 막상 이직을 하고 보니 그 간극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아무리 회사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인들, 또 같은 업계, 같은 분야인들, 운영 방식은 매우 달랐던 것이다. 사실상 수익모델은 같거나 비슷한데도 회사마다 직원에게 기대하는 가치나 태도에 차이가 크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기도 했다.
이직을 위해 회사들과 인터뷰를 볼 때,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양의 일들을 얼마나 빠르게 처리해오고 있는지를 자랑스럽게 어필했다. 내가 내세울 수 있는 나의 가장 큰 강점이었고 실제로 이전 회사에서 늘 칭찬받아오던 능력이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나를 인터뷰하던 현 나의 보스이자 우리 부서 파트너 변호사 중 한 명인 레슬리가 내게 했던 말은 아직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신이 그동안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업무들과 거래들을 신속하게 처리해 왔다는 사실은 매우 인상 깊고 훌륭하지만, 우린 그런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니에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다루는 부동산법 관련 일들은 '계약'과 '거래'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분초를 다툴 만큼 시간에 민감한 일인 데다 그동안 늘 엄청난 양의 케이스를 혼자 처리하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메인 업무에 더해 온갖 기타 행정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것은 기본이요, 클라이언트나 에이전트들에게 무조건 친절하게 굴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지간한 업무량에는 자신이 있었고 야근도 자신 있었다. 이 분야와 업계의 생태계를 잘 안다고 믿었고,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은 어딜 가나 반길 거라는 (건방진)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닥치는 대로 일을 배우다 보니 지금보다는 시스템이 잡혀있는 곳으로 이직을 하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었지, 업무 환경 자체의 향상은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나은 처우를 받으며 커리어가 발전할 수 있는 곳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직접 오피스에서 이루어진 현 회사와의 대면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그래도 내가 써볼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었던지, 출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왜 내가 하던 방식이 모든 곳에서 늘 환영할만한 태도는 아닌지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이직한 로펌에서는 거래를 많이, 그리고 빨리 처리하기보다는 '정확하고 신중하며 철저하게' 성사시키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다 보니 모든 과정에 소모되는 시간을 훨씬 더 길게 예상했고 그러니 훨씬 적은 케이스들이 각자에게 분배되었다. 이전 회사에서는 서너 파일을 혼자 끝내야 했을 시간 동안 현 회사에서는 하나의 파일도 채 끝나지 않을 정도라 느려진 페이스를 맞추는 게 힘이 들 지경이었다. 대신 이전 회사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겼던 아주 작은 부분들이 이곳에서는 신중하게 검토되었다.
그러니 이전 회사에서 아주 훌륭하다고 평가해 온 '일단 끝내고 보는' 업무방식은 이곳에서 도움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이상적인' 모습이 될 순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느리게 진행되는 과정을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클라이언트마저도 이런 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협조적이었는데, 이전 회사에서 겪고 보던 풍경과는 너무 달라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들이 개인보다는 수십 년 동안 함께 일해온 기업들인 경우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개인 클라이언트들 마저도 기다리는 것에 매우 관대했다. 그들은 애초에 이런 방식의 일처리에 동의하고 만족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우리 회사에 일을 맡기는 것이었다. 우리 회사의 방식이 맘에 들지 않으면, 그러니까 이를테면 무조건 빠르고 알아서 해결해 주길 바라는 로펌을 원하면 우리와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기업도 고객을 선택해 온 것이다.
그 외에도 같은 일을 하는 로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고 작은 부분들에 무수히 많은 차이가 있었다. "회사의 문화"가 업무 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음을, 그러니 회사의 인재상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음을 절실히 느끼며 이전의 내 건방졌던 사고방식을 반성하게 되었다.
물론 규모가 작았던 이전 회사 특성상 수임하는 일의 종류와 고객들은 고만고만한 경쟁사들과 죄다 비슷했고, 그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더 수익을 내기 위한 차별점을 만들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다들 비슷해'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고 변명해 본다. 작은 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차이점과 얻지 못했을 이 깨달음들이 귀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용기내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아직도 작은 웅덩이 안에서 제가 용인 줄 알며 바깥은 이럴거야 저럴거야 생각만하는 도마뱀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