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서 한국식 일처리란
끝없는 야근, 잡무의 지옥이었던 이전 회사의 기억이 벌써 까마득하다. 인간이란 참 적응의 동물이다. 그 힘들었던 3년간의 '노가다'를 싹 잊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업무는 10분의 1로 줄고 인간관계에서 받던 스트레스도 싹 사라졌다. 스스로도 당시엔 대체 어떻게 그리 일했을까 싶은데, 아마 알고는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배운 게 많고 덕분에 이직을 할 수 있었다 해도 다시 떠올리면 아직도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지만 스스로 대견스러울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열정을 가진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사실 이직한 현 회사가 환상적으로 완벽한 회사일리도 없는데 (그런 곳은 존재하지도 않겠지만), 이 만족감의 어마어마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회사를 평가하는 항목을 나열한다면 모든 부분에서 다 향상되긴 했지만, 가장 큰 차이를 부르는 항목 한 가지는 놀랍게도 다름 아닌
한국인과 일하지 않는다
는 사실이다. 한국인 클라이언트와 직장 동료, 상사가 없다는 사실 하나로 직장 생활에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절반 이상으로 줄어든 까닭이다.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정말 한국 사람들을 좋아한다. 잘 챙겨주고, 따뜻하고, 또 타국에서 모국어로 대화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한국사람들과 일하면서 보람되고 감사했던 기억도 많다. 하지만 이곳이 "캐나다"이다 보니, 한국인들과 일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회사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유도 클 것이다.
한국인들은 캐나다에서도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식" 일처리를 기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한국인들은 고용주든 고용인이든 기본적으로 서비스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높다. 한국의 서비스업이 원체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로펌이어도 예외는 없다. 클라이언트들이 돈을 주고 일을 맡겼으니 이 정도는 해 줘야지, 하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 치는데, 문제는 그 '이 정도'라는 기준이 캐나다 사회에서 볼 때는 어마어마하게 높다는 것이다. 한국식 빠른 일처리에 익숙한 이들은 재촉하는 전화는 기본이요, 본인이 직접 해야 하는 행정상의 일도 죄다 대신해 달라고 조르면 차라리 다행이고 명령조로 시키기도 일쑤다. 직접 해야 한다고 하면 '돈 주고 맡겼는데 그것도 안 해주냐'라고 한다. 선임비에는 그 일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데다 또 개인정보에 굉장히 민감한 캐나다에선 당사자 대신 '안' 해주는 게 아니라 '못' 해주는 경우가 더 많은데도, 유독 한국에 살다가 이민을 온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한국 회사들은 또 어떤가. 캐나다에서도 한국인이 주 고객인 작은 회사들은 타 경쟁 한국 회사에게 클라이언트를 뺏길까 전전긍긍하느라 한국식 운영을 피할 수 없다. 이런 회사들은 시장에서 차지할 수 있는 파이의 크기 자체가 작으니 일단 한국인 고객을 붙잡는데 급급해서 책임질 수 없는 말을 섣불리 하고, 온갖 필요 이상의 (혹은 하면 안되는) 사소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며 고객을 '베이비 시팅' 하는데 포커싱한다. 직원들의 업무 부담은 점점 오르고 말도 안 되는 마감 시간을 지켜내느라 야근은 자연스러워지는데, 과도한 업무에 피로가 말도 못하게 쌓여도 늘 상냥하고 친절하길 강요받는다. 직원들의 괴로움은 당연한 '월급값'으로 친다.
캐나다에서도 유독 꼼꼼한 일처리가 요구되는 직종은 있지만 한국 사람들만큼 엄격한 기준을 내세우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니 한국 사람 눈에 캐나다는 느려터지고 허술한 것 투성이다. 간혹 계산이 잘못되어 나중에 정산을 더 해야 할 일이 생겨도 잘 못 표기를 한 사람 잘못이니 못 낸다며 생떼를 쓰는 한국인들도 많다. 불편한 마음이야 백번 이해하지만, 전문가의 나태함에서 비롯된 치명적인 잘못이 아닌 ('Due diligence'가 아닌) 경우, 모든 서류는 의도치 않은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캐나다에서는 단순 계산, 표기 실수 같은 것을 이유로 마땅히 당사자가 정산해야 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는 없다.
캐나다의 관공서, 은행 등 기관들과 일을 하다 보면 그들의 '답답한' 일처리에 복장이 터진다. 느려도 너무 느린 데다 오류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을 올리고 따져 보아도 이곳에서는 그냥 "어 그러네, 미안해" 하고는 다시 한참을 걸려 바로잡을 뿐이니,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람 입장에선 어찌 열불이 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서비스에 대한 높은 기대감과 기준, 엄격한 잣대 때문에 한국의 서비스업 퀄리티가 높은 거라고 생각하면, 내가 한국에서 받아온 그 편리함이 마냥 편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빠릿빠릿한 데다 친절하기까지 한 한국인, 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싶은건 지나친 노파심일까. 그들이 대단하고 감사한 일이지, 당연한 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건 너무 무리일까.
이직을 하고 보니 이전엔 마냥 느리고 답답하게만 느껴지던 캐나다가 다시 보인다. (물론 캐나다라고 다 같지는 않을 것이다) 개선되길 바라는 캐나다의 문화도 셀 수 없이 많지만, 실수에 조금은 더 관대한 문화 덕분에 사람들이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는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적어도 캐나다에서만큼은 캐나다식 일처리가 익숙해져야 하니까.
처음 새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고 과도한 긴장감으로 허우적거릴 때, 매니저 코니가 입버릇처럼 해준 말을 나는 지금도 종종 되새기곤 한다.
We are only human.
한국이든 캐나다든, 우린 그저 인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