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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Erika Apr 06. 2023

추진력을 얻으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대한민국 문과생, 캐나다 직장인으로 살아남기 <10>



나름 애정을 가지고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사표에 쓰고 싶은 말은 산더미인데 결국 하지 않는다. 피치 못할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두는 게 아닌 이상 이런 선택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회사의 문제점을 사직서에다 깨알같이 쏟아내고 싶지만, 그만두는 마당에 이런 소리해서 무엇하나. 그냥 최대한 뒤탈 없이 조용히 사라지면 좋겠다.


금요일 저녁,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이메일이 전송되었다. 내 사직서는 그간 상상해 왔던 것보다 훨씬 짧고 간결한 모습이었다. 마찬가지로 많은 말을 꾹 눌러 담았을 간단한 답변으로 사표는 승인되었다. 캐나다는 퇴사 2주 전에 노티스를 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월요일에 회사에 복귀하고 짧으면 2주간 업무를 마무리한 후 회사를 떠나게 된다는 말이었다.


몇 년간 그리 동고동락했어도 결국 끽해야 서너 문장을 주고받으면 정리되는 세월이라니. 허무하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회사를 연인관계에 비유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느 쪽에서건 '헤어지자'는 한마디면 끝이 나는 관계라는 점에서는 같다. 직장생활은 사회생활이고, 사회생활은 인간관계다. '회사'라는 단어는 결국 조직 간부들과 나의 보스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퇴사를 하고 회사를 떠난다는건 내 직장 상사로부터 떠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내 회사도 아니건만 난 적당히 일하는 법을 몰라 참 애를 많이 썼고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 (나혼자) 안타까웠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다음 거취를 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감히 간 크게 퇴사를 저지른 상태였다. 시원섭섭하네 어쩌네 하며 감상에 젖어 있을 군번이 아니었다. 당장 퇴사는 결정됐는데 당시 나는 단 한 달도, 아니 단 몇 주도 쉴 수가 없는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 센트(Cents)까지 끌어모아 집을 샀으니 모아놓은 돈이 있을 리 없었고, 미쳐버린 금리 상승으로 주택담보대출 이자는 매달 치솟고 있었다. 몇 주만 쉬어도 당장 고지서를 내지 못할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퇴사를 생각했다니 생각해 보면 나도 참 단단히 미쳤었다 싶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상황에서조차 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절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그랬기 때문에 단순히 현 회사로부터 도피하는 것에 타협하지 않고 "제대로 된" 이직을 하기 위해 더 진지하게 노력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빚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고 일부러 빚을 질 필요는 없지만.......






월요일, 출근을 하니 내 퇴사 소식을 전해 들었을 매니저가 나를 본척만척하며 싸늘하게 굴었다. 참 그녀답다 싶었다. 어쩜 저렇게 감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태도에 드러내고 살까 싶은데 본인은 언제나 프로페셔널한 포커페이스라고 믿고 산다는 게 유머 포인트였다. 차라리 일관되어서 다행이었다. 그 후 마지막 날까지 내 선택이 옳았음을 그녀가 온몸으로 보여준 덕분에 나는 차분히 내 일을 마무리하고 구직에도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다행히 머지않아 이직할 회사를 결정할 수 있었다. 자칫 백수가 되어 구직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될 뻔했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당장 돈이 급한 게 아니라면 그만두고 푹 쉬면서 구직에만 몰두하는 게 더 좋지 않나 싶을 수도 있지만, 이직은 퇴사 전에, 회사를 다니면서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특히 같은 직무라면). 그렇지 않으면 인터뷰 때 왜 퇴사를 했는지 캐물을 것이니 납득할만한 이유를 잘 준비해 두어야 한다. 이때, 회사를 탓했다간 인내심이 부족하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기보단 도망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므로, 회사를 퇴사의 원인으로 말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누가 나랑 안 맞았다던가 하는 식으로 돌려 말하지도 말 것. 역시나 인내심이 부족해 보이고 조직에 잘 융합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회사 입장에서 현재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을 인터뷰 할 때는 단순 채용을 넘어 타 회사의 인재를 '스카웃' 하는 과정이란 느낌을 받는다. 후보자는 별로 매력적인 오퍼가 없으면 다니던 회사를 계속 다니면 되니 아쉬울 게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구직자가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쉽다. 뿐만 아니라 간혹 구직자가 가장 직전에 퇴사한 회사에 살짝 연락을 해서 재직시절 그 사람이 어땠는지, 퇴사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등을 물어보는(!) 경우도 있는데, 이직의 경우에는 그런 일은 없다. 상식적으로 후보자가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 감히 연락을 하는 짓은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수인계는 2주가 보통이지만 회사 사정을 생각해 한 달 정도를 하기로 했다가, 3주만 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조정되었다. 매니저와 좁은 오피스에서 보내는 3주는 정말이지 하루가 일 년 같이 길었다. 감사하게도(?) 새 회사는 내가 하루라도 빨리 팀에 합류하길 바랐다.


유치원생처럼 대놓고 차갑게 굴던 그녀는 결국 마지막 날이 되자 내가 퇴사를 본인과 상의하지 않았다는 것에 적잖은 서운함을 드러냈는데 (???), 타 회사 경험도 전무하고 , 직무에 아무것도 상의할만한 커리어가 없는, 거기에다 수년간 팀에 분란을 조장해 온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감정을 표출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기야 그녀는 본인만큼 내게 잘해준 사람은 없다고 믿을 테니 천하의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나를 기억하며 나의 불행을 기도할 것이다. 그만둔 직원들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이 늘 그녀의 입버릇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그녀의 가스라이팅과 궤변을 참고 들을 일이 없다는 사실만으로 그녀의 저주는 반가울지경이었다.





김성모 <대털2.0> 중에서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더한 고난과 역경을 만난다? 그럼 또 움직이지 뭐! 한 번 했는데 두 번은 못하랴. 지난날들을 그렇게 미련스럽게 버텼던 이유는 이 시간을 위해서가 아닌가. 당장 회사가, 내 상사가 나의 진심과 열심을 몰라주거나 혹은 모르는 척 해도 나는 내 시간들을 안다. 그것들은 어디가지 않고 내 미래 어딘가에서 든든한 밑천으로 기다리고 있다.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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