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리카 Erika
Mar 02. 2023
재산세 고지서가 왔다. 우편함에 정부기관으로부터 온 우편이 있으면 봉투만 보고도 긴장이 된다. 종이 우편으로 받지 않을 뿐 전깃세며 관리비며 각종 고지서들을 이미 무수히 처리하고 있는데, 또 무슨 돈을 내라고 할까 싶어 지레 겁이 난다. 다행히 재산세는 올해 초부터 잊지 않고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타격이 덜했다.
영주권을 받고 처음 한 일은 집을 산 것이었다. 영주권 승인서류가 나온 날부터 부동산 계약서 서명까지 채 2주가 걸리지 않았으니, 영주권을 "받자마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당시엔 영주권이 없는 외국인이 토론토에 부동산을 구매하면 매우 큰 금액의 외국인세를 내야 했는데 (지금은 외국인 부동산 구매가 전면 금지되었다), 그렇다 보니 남들 눈에 나는 영주권만 나오면 집을 사려고 아주 벼르고 있던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영주권을 받으면 적극적으로 집을 살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정말 곧장 집을 사게 될 거라곤 나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급발진은 주변인들과 한국의 가족들에게도 다소 충격이었다고 하는데, 첫 번째는 나의 실행력에, 두 번째는 "쟤가 그럴 돈이 있었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내가 금수저 유학생 출신이었다면 나의 이런 행보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겠지만, 난 유학생 시절부터 직장인이 되어서까지도 방 한 칸을 빌려 살며 부엌과 화장실을 남들과 같이 쓰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방 한 칸을 빌려 사는 것을 이곳에선 "룸렌트"라고 하는데, 개중에도 더 싼 반지하 룸렌트를 전전했다. 벼래 별 집에서, 벼래 별 사람들과 살며 룸렌트의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는데 도가 튼 지경이었다.
졸업 후 취업은 했지만 당시 수입으로는 기본적인 생활비조차 감당하기가 어려워 오히려 학생 때보다 더 팍팍하게 살았다. 교통비를 아끼려 회사에서 도보로 15-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방을 구해 무조건 걸어 다녔다. 겨울에는 히터를 틀어도 코가 시리게 춥고 여름에는 섭씨 35도까지 달아오르는 낡은 주택 2층의 가장 후미진, 반지하보다도 싼 방이었다. 식사는 하루 5불을 넘기지 않았고 매일 한 끼만 먹었다. 때마침 남자친구와도 헤어진 덕분에(?) 데이트 비용이 들 일도, 친구들과 나가 노는 일도 없었다. 너무 구질해질까 더 자세히 쓰진 않겠지만, 하여간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쓰고 살았다. 그리고 미친 듯이 회사 일에만 몰두했는데, 남들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쌍하게만 봤지만(그럴 만도 했다) 사실 그때 난 아끼는 재미에 살았던 것 같다. 와 씨, 이걸로도 살아지네? 매달 혼자 기록 세우는 재미. (물론 이렇게 사는 건 건강상 매우 위험하므로 오래 할 일은 못된다. 나더러 다시 이렇게 살라고 해도 못 살 것 같지만.)
열악한 곳에 살면 회사에 오래 머무는 게 힘들지 않다. 적어도 회사 오피스는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했으니! 그렇게 초등학생이 용돈 모으듯 5불, 10불을 아껴 저축을 하고 주식 투자도 했다. 돈을 모아 가장 갖고 싶은 것은 또래들이 다 탐내는 명품백도 아니요, 자동차도 아닌, "공간"이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공간 하나. 집주인들과는 잘 지내는 편이었지만 룸렌트는 세입자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서 집주인이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나가야 했다. 언제 나가야 할지 모르니 짐을 푸는 것도 무서운 생활만 수년째 하다 보니 이사라면 지긋지긋한 지경이었고 개성 강한 다른 세입자들과 함께 맞춰 사는 일도 쉽지 않았다. 덕분에 이젠 어지간한 환경에서도 무던하게 지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지만.
한국에서 지원을 받던 유학생 친구들은 일찌감치 혼자 콘도나 아파트를 빌려 편하게 지내고 있었고 나역시 아주 무리를 했다면 혼자 쓸 작은 스튜디오라도 렌트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한화로 200만원 가까이 되는 월세를 감당할 깜냥도, 벌이도 없었다. 내가 무식하게 1, 2불조차 저축하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경제, 부동산과 주식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는데 열중했던 건, 정말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급여가 올라도 내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간 저축과 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밴 덕분이었다. 특히 사소한 물건도 내게 온 것이라면 귀하게 여기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게 무엇이 어울리는지를 알게 되어서 쇼핑할 때 시행착오를 겪는 일이 거의 없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입고 먹고 다니든지엔 전혀 관심이 없는 캐나다 문화 덕도 컸다. 궁상맞게 사는 것과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고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안정적으로 해오던 주식 투자도 운이 좋아 좋은 수익을 남겼다.
그렇게 만 서른이 되던 해, 생에 첫 집을 토론토에 샀다. 부촌으로 알려진 길 위에 있는 적당히 오래된, 지금 살고 있는 아주 작은 콘도 유닛이다. 물론 풀로 땡긴(?) 변동금리 대출이자에 여전히 생활비는 조금도 여유가 없다. 하지만 언제 또 렌트비가 오를까 이사를 가게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먹고 싶은 요리를 맘껏 할 수 있고, 가족과 친구를 쉬고 가게 할 수 있고, 맘껏 벌거벗고 다녀도 되는 공간이 주는 기쁨이란!
월세 감당할 깜냥은 없었을지언정, 대출은 감당할 깜냥이 생겼다면 모순일까. 애써 외면해오던 이번 달 카드 명세서와 인터넷 요금 고지서는 내일 출근해서 사무실에서 처리할 요량이다. 빚은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든다고 했다. 아, 즐거운 나의 집(빚)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