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그래 거리가 필요해
# 외며느리 고운 데 없다.
며느리와 관련된 속담들이 생각보다 많아 놀라웠다.
고양이 덕과 며느리 덕은 알지 못한다.
(많은 도움을 받았더라도 남 보기에 뚜렷한 공이 없으면 알아주지 않는다).
뚜렷한 공… 어렵다.
고양이 덕은 알고 며느리 덕은 알지 못한다.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은 고맙게 여기지만, 며느리가 집안일을 하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은 당연하게 여긴다).
며느리가 고양이 보다 못하다고?
외며느리 고운 데 없다.
(며느리가 혼자라서 비교할 수도 없고, 본디 며느리는 밉게 보이기 마련이다).
제일 와닿는 속담이다. 그렇구나, 며느리가 많든 적든, 며느리는 그냥 미운 거구나.
결혼 후 십 수년 동안 어머니의 행동이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의도가 있으신 건지, 그냥 아무 생각이 내뱉으시는 건지, 길들이려 하시는 건지, 그저 얄미우신 건지.
이제는 이해하기를 포기한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다.
# 엄마는 다를 것 같아.
아들이 엄마는 다를 거라고 말한다.
나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똑같은 말을 결혼 전에 남편한테서 들었었다.
남편은 자신 있게 말했었다.
“우리 엄마는 달라. 성격도 좋으시고 쿨하셔. 친딸처럼 잘해주실 거야.”
그때는 정말 그럴 줄 알았다.
‘응, 아니거든’.
개인의 성격 구조에는 다양한 특질들이 있고, 대상에 따라 표출되는 특질들이 다른 것 같다.
아들에게 쿨하다고 며느리에게도 쿨한 것은 아니다. (냉정, 거침없는 것이 쿨이라면, 그래 쿨하셨다.)
며느리가 딸이라고?
놉!
며느리는 조건이 전제된다. 며느리가 딸이라는 성스러운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응당 며느리로 요구되는 역할과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딸이라는 친밀한 관계를 가장하여 딸도 하지 않을 법한 역할과 행동들을 요구하고 착취하지만, 정작 딸과 같은 무조건적인 배려와 사랑은 없다.
# 다르도록 노력할 거야.
‘며느리 늙어 시어미 된다’는 말처럼, 나 역시 언젠가는 시어머니가 될 날이 올 것이다. 온갖 사랑으로 키운 외동아들. 나도 결국은 보통의 인간일 뿐이라, 어느 순간엔 기대하고 바라게 될까 봐 겁이 난다.
지금 당장은 선뜻 대답할 수 없지만, 나는 다른 시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모두가 행복해야 하니까. 아니, 누구 하나라도 불행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관계에서 시작은 중요하다. 특히 고부 관계는 그 첫 단추가 평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우리 고부 사이는 그 시작이 참 아쉬웠다. 신뢰의 기반이 처음부터 단단히 다져지지 않다 보니, 작은 일에도 관계는 모래알처럼 쉽게 흩어졌다. 만약 그 초반에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를 조금 더 두고, 서로를 배려하려는 노력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 생각이 종종 안타깝게 남는다.
거리를 두다.
TV 프로그램 ‘동치미’에서 들은 말이 있다. 자식이 결혼하면 부모는 5순위로 내려가야 한다고. 부모가 자꾸 1순위에 올라가려 하니까 문제가 생긴다고. 정말 깊이 공감했다.
적당한 물리적 거리는 필요하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한데, 하물며 ‘시’ 자 들어간 관계는 말해 무엇하랴. 가까울수록, 거리가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기대를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심리적인 거리다. 기대를 하면 바람이 생기고, 바람이 무너지면 서운함이 되고, 서운함이 쌓이면 결국 미움이 된다.
‘백년손님’이라는 말처럼, 며느리도 손님처럼 대하면 어떨까. 손님에게는 자연스레 존중과 배려가 따라오지 않던가.
애초에 며느리에게 주어진 ‘역할’이나 ‘의무’란 없다. 그저 사람 대 사람, 인간으로서의 도리만 있을 뿐.
나는 며느리로서의 역할이라는 틀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갇혀 살았다.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 역할이 너무 부당하다고 느낄 때, 나의 본성을 의심했고, 스스로의 이기심을 탓했고,
왠지 모를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며느리가 행복하지 않으면 가족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아들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기대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들은 변할 것이다. 좋든 싫든, 시간과 상황에 따라, 그에 맞는 새로운 역할을 스스로 만들어갈 것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내 품 안의 아이가 아닌, 자기 가정을 꾸린 독립적인 사람임을 인정해야지.
말을 아끼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말을 아껴야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게 참 어렵다. 사랑하니까 해주는 말, 걱정해서 던진 조언— 그건 내 입장일 뿐, 상대방은 그것을 ‘간섭’이나 ‘잔소리’, 혹은 ‘강요’로 느낄 수 있다. 내 뜻은 선의였지만, 결과적으로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하지만,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은 아끼지 않을 것이다. 고마우면 고맙다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말하면 된다. 그게 자존심 세울 일인가?
무엇보다, 바쁘게 살자. 기대나 서운함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게 어쩌면, 가장 건강한 거리 두기일지도 모른다.
배너 이미지: 우국원 '케세라 세라 (2021년)'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 is not ours to s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