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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이야기] 마음을 바꿔봤어요.

버티는 것도 능력이다

by 코지모

“저 이직합니다.

대내외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합니다.”


“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표님은 몇십 년을 근무하셨고 회사에 대한 애정이 크셨던 분이라, 은퇴가 아닌 이직은 상상도 못 해서 놀라기도 했지만,


선수를 치셨다…


언제 그만두는 것이 유리할지 머리를 굴리며 타이밍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퇴사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에는 그 결정이 나의 뇌를 온통 지배하여, 주변의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던 터였다.


그냥 대충대충 다녀.

이만한 직장이 어디 있어.

대책 없이 왜 나가.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 나가도 뚜렷한 대책은 없다. 그렇다고 여기 있다고 해서 나지는 것도 없다. 나의 업무, 역할, 그리고 자원은 8년 동안 변화 없이 정체되어 있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밖에서는 그럴듯해 보이는 회사지만, 정작 나는 성장할 수도 없고 무언가를 시도할 수 없는 구조 안에 있다.


늘 경제적인 이유로 자리를 지켜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진다.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남은 반평생 인생이 달라질 것 같다. 막다른 길목에 서 있는 이 시간에 나는 더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대표님 지시대로 APAC과의 대내외 커뮤니케이션, 임직원 타운홀 등 준비 및 실행으로 몇 주가 정신없게 흘렀고 연말 연휴에 돌입했다.


긴 연휴 동안 나의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기로 했다. 자연스레 지난 커리어 인생도 되돌아보았다.



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25년 넘게 큰 공백 없이 꾸준히 직장 생활을 해오며 밥벌이를 하고 있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 덕분에 학창 시절 몇 년간 해외에서 보내 영어로 나불거릴 정도는 되고,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대에 다양한 커리어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어려웠던지라, 주변인들의 커리어가 주요 가이드가 되어 월급쟁이 직장 생활이 최선인가 보다 했다.


뚜렷한 커리어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뛰어난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결혼 후에는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종속되지 않겠다는 나름의 인생 목표(?)를 갖고, 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으려 나름 애써왔다. 능력 대비 시대의 흐름을 운 좋게 잘 탄 덕분에, 남들이 보기엔 그럴듯해 보이는 외국계와 국내 기업을 옮겨 다니며 커리어를 이어올 수 있었다.


커리어에 대한 욕심과 기대에 비해 의지가 박약하여,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스펙터클한 커리어 트랙은 아니지만, 남들이 보기에 큰 굴곡 없이 무던하게 이어진 이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나름의 꾸준한 인내와 노력이 투입되었다.


‘돈보단 일의 재미’가 더 중요하다고 꼴값을 떨며, 일이 재미없어지거나 미래가 안 보인다고 판단될 시점에는 과감히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평균 5년 주기로 그랬다. 내 결정에 후회는 없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버티는 것도 능력인데 그 능력 더 발휘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의 회사가 9년 차가 되니, 내 커리어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이 되었다. 중간중간 정체기 때마다 ‘과연 내가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들 때마다, 더 작더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나를 더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떠나볼까 고민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회사에서 보고라인 또는 약간의 조직 변경 등 희망적인 변화의 조짐이 있어 눌러앉았고 (결과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50대를 바라보는 나이에 이만한 회사도 없겠지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머물렀다.


하지만 지금의 커리어는, 내가 그렸던 50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어엿한 조직과 팀을 이끌며, 성장 비전을 제시하고, 큰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후배들의 커리어까지 함께 성장시키는 역할을 기대했지만, 이제 그런 커리어는 멀어져 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데, 쥐꼬리만 한 예산을 가지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부서에서 여전히 업무 확장 수준의 고민만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중간관리자급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듯해 스스로가 작게 느껴졌다.




연말이 지나 한 해가 바뀌고,

새해의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1 추가된 나이 숫자 때문이지, 문득 내 안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속삭인다. 몇 달 후에 보내야 할 아이 학비와 생활비에 속이 답답해진다.


‘5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무슨 커리어 타령이야, 잘리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야. 머리가 잘 굴러가는 한 그냥 붙어 있지 그래?’


그래, 조금만 버티자 마음먹는다. 버티는 것도 능력 아닌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것에만 매달리지 말자.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일 안에서, 재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더 잘할 수 있는 부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더 찾아보자, 더 노력해 보자.‘


‘그저 하루하루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다 보면, 막막하더라도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격려해 본다. 동시에, 지금 이 회사 이후의 삶 -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조금씩 준비해 나가기로 했다.


지금 내 안에서 힘을 낸 이 목소리가 옳은 건지, 현실에 타협을 한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는 건, 헛된 소리는 아닐 거라 믿기로 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연초, 회사에 출근하자 동료가 내 얼굴을 보며 말한다.


“작년엔 얼굴이 많이 까칠했는데, 얼굴이 좋아졌어요. 화장품 바꿨어요?”


마음이 편해지니 그게 얼굴에 드러나는 걸까.


“화장품 말고,

마음을 바꿔봤어요.

(당분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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