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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이야기] 아빤 행복했을까

by 코지모

어릴 땐 아빠가 전부였다.

자동차든, 식당이든, 아빠 옆에 앉을 건지를 두고 여동생과 티격태격 싸우던 그 시절. 마치 좋아하는 아빠 옆은 특별한 자리라도 되는 양, 꼭 그 자리를 차지해야만 했다. 아빠도 자리 싸움을 말리시면서도 은근히 즐기시지 않았을까?


그러다 훌쩍 사춘기가 지독하게 왔다. 그땐 외국이었고, 문화도 사람도 낯설었고 적응하랴 바빴다.

이유도 없이 아빠의 시선, 손길이 싫었다. 자리다툼도 더 이상 없었다. 이유도, 계기도 없이 그저 그랬다. 그렇게 멀어졌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한국으로 돌아왔고, 또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 새로운 일상, 그리고 사회생활, 결혼, 출산 등 정신없이 살아내는 동안 아빠와 단둘의 시간을 가진 적은 손에 꼽힌다. 명절이나 가족 모임, 중요한 날들엔 뵀지만, ‘아빠와 나’만의 시간은 좀처럼 없었다.


정말 너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퇴직 후 밴쿠버에 정착하셨고, 가까이에 친구분들도 계시고 작은아버지도 함께 계시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직장 생활에 치이다 보니 매년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2~3년에 한 번씩은 시간을 내어 찾아뵈었다.

하지만 그 방문조차, 돌이켜보면 내 치열한 한국 생활에서 잠시 도망치기 위한 도피처였고, 아이를 핑계 삼아 내 할 일만 챙기고, 다시 ‘바쁘다’는 이유로 서둘러 돌아왔었다. 생각할수록, 참 못된 딸이다.


아빠를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다.

이북에서 아빠의 아버지에 의해 어린 남동생과 남으로 내려오신 아빠는 어머니를, 고향을, 잃어버린 가족을 그리워하며 평생 살아오셨다. 생전에 그런 아픔을 보듬어 드리지 못했다.

공부를 잘하셔서 명문대에 입학했고, 국비 장학금으로 미국 의대에 갈 기회도 있었지만, 넉넉하지 않은 집안살림을 돕기 위해 그 길을 포기하고 그 당시 최고의 직장이었던 은행원이 되셨다.

대쪽 같고 곧은 성격으로, 융통성과 타협이 필요한 은행원이라는 직업과는 맞지 않았지만, 묵묵히 가족을 위해 평생을 감내하셨다. 월급쟁이 직장인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긴 세월 그 고단함과 책임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월급쟁이 부모가 되니 이제야 안다.


돌아가신 후에야,

작은아버지를 통해 아빠의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의 내가 알지 못했던 면모에 대해 들었다. 똑똑하고 영리하셔서 온 가족 친척들의 기대를 받았고, 그림 그리기 등 재간이 많으셨고, 멋 부리기를 좋아하셨던 아빠 (그 시절 또래에선 보기 드물게, 카라 없는 라운드넥 와이셔츠를 즐겨 입으셨다). 어쩌면 다른 길을 꿈꿨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생전에 최선을 다한 사람은, 돌아가신 뒤엔 담담하다고 사람들이 그런다.

엄마는 아빠 살아생전 아빠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꺼이 주셨기 때문에 편안하게 보내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나는…모든 게 아쉽고 죄송스럽고 허망하다. 십 년 넘게 아빠 생각만 하면 눈물이 터졌고 지금도 가끔 그렇다. 어쩌다 그토록 무심했을까. 후회와 죄책감 앞에서 주저앉는다.


곧 아빠의 기일이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더욱 생각한다. 조금만 더 따뜻하게 대해드릴 걸, 조금만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걸.

"나중에"라고 미뤘던 그 말들, 그 마음들이 이제는 어디에도 닿을 수 없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빤…

그래도, 그 와중에 행복하셨을까.

가끔은 정말, 그게 궁금하다.



배너 이미지: Edgar Degas, ‘Rouart and his daughter Hélène’ (1871-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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