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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Aug 05. 2020

이 나라, 참 여자가 살기 편하구나

싱가포르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해외에서도 한국인은 특유의 패션과 메이크업으로 참 알아보기 쉽다.

나도 싱가포르 생활 초기에는 아직까지 미백에 신경을 쓰고, 출퇴근을 할 때에는 '오피스 룩'을 갖춰 입고 (블라우스에 스커트, 스킨톤의 힐이나 샌들, 단정한 시계), 머리는 긴 웨이브에 풀메이크업을 한 전형적인 '아이엠 코! 리! 안!'이었다. 누구를 만나도 "You're Korean ah? (너 한국인이지?)"를 듣던 나였다. 지금은 한국인이라고 하면 놀라면서 현지인인 줄 알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쏘 코리안이었던 나는 점점 싱가포르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하얀 피부보다 건강하게 태닝 된 피부에 '나 운동하는 여자야' 포스가 뿜뿜하는 다부진 몸매로 핏 되는 원피스나 A라인 스커트를 입고 랩탑용 백팩을 메고, 손에는 퇴근 후 헬스장에 들고 갈 운동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커리어우먼들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싱가포르의 비즈니스 중심가 Raffles Place © 에리카

주말에 외출할 때면 나름 예쁘게 꾸미고 나간다고 신경 써서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나갔는데, 그때마다 싱가포리언 친구들과 외국인 친구들은 너무나도 프리 하게 그냥 짧은 반바지에 나시 하나, 혹은 반팔에  슬리퍼나 샌들 차림으로 나오곤 했다. 아예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아서 처음엔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엔 나도 그런 자연스러운 패션과 태도가 멋스러워 보였고 오히려 너무 티 나게 꾸미는 게 촌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주근깨가 가득한 친구들의 얼굴이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이미 다들 레이저 시술을 권유받았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나도 조금씩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 출근 전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기도 하고, 회사 근처 헬스장에서 자유 웨이트를 하거나 요가 클래스를 듣기도 했다. 싱가포르는 아침 해만 뜨면 금세 엄청난 더위가 시작되기 때문에 동이 트기 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 기분이 참 좋았다. 조금씩 몸이 탄탄해지면서 자신감도 같이 커져갔다. 한국이라면 상상하지 못했을 딱 붙는 져지 소재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파워워킹을 하며 다른 멋진 자매님들과 함께 당당하게 걸어가는 그 출근길이 즐거웠다.


뻔하지만 안 찍으면 서운한 마리나 베이 샌즈. 한창 웨이트 재미 붙였을 때

한국에선 출근길에는 하이힐을 신고 오피스에 도착하면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는 멋진 원피스를 입고 아래에는 플립플랍이나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처음엔 조금 의아했지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걷는 동안 내 발을 편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니, 어느 순간 나도 그게 자연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워낙 날씨가 덥다 보니 시원한 차림, 편안 차림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출근길인데도 노 메이크업은 기본이고, 빗질도 제대로 안 한 것처럼 보이는 여성들도 간혹 있어 처음엔 적잖이 놀랐다. 전반적으로 한국에 비해 여성들이 외모에 대해 좀 더 자유로운 태도라고 할까. 그냥 편하게 말해 진짜 프리 한 자매님들이 많다. 물론 꾸미는 걸 좋아하는 여성들도 많지만, 우리나라 여성들에 비하면 정말 적은 편이다.


싱가포르에 살면서 그동안 내 무의식 중에 자리 잡고 있었던 '여자는 꾸며야 해.' 혹은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해.'라는 공식들이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하지만 처음에는 나 또한 이전의 고정관념, 사회적 압박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처음에 너무나도 자유로워 보이는 싱가포르의 자매님들을 봤을 때는 은연중에 그들을 판단하는 태도가 나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여자인데, 너무 한 것 아니야? 머리 정도는 좀 빗자. 와... 저 발뒤꿈치 좀 봐. 진짜 관리 좀 하지.'라는 마음의 소리가 불쑥불쑥 나왔다. 그럴 때마다 '아니, 내가 뭔데 저 사람이 관리를 하네마네 하지?' 라며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점점 편안한 차림에 익숙해져 갔고 자연스럽게 성격도, 내 태도에도 함께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언제나 따뜻한 (혹은 찌는) 날씨와 길거리 곳곳에 보이는 야자수 또한 그 변화에 한몫한 것 같지만 말이다.  


좋아하던 각 잡힌 가죽 가방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가볍고 편한 에코백이나 작은 크로스백 하나만 챙겨나가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아예 카드 하나만 챙겨가고 아무것도 안 들고 다닐 때도 있었다. 그러다 가끔 한국에 갈 때면 마치 연예인처럼 풀세팅을 한 일반인들을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내가 싱가포르에 가더니 현지인이 다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 말의 의미가 '어머, 내 딸이 왜 이렇게 까매졌고 안 꾸미지?'라는 것은 굳이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지셨지만!)


한동안 간단하게 밥과 몇 가지 반찬을 만들어 도시락을 싸갔을 때는 회사 동료들이 일부러 내 도시락을 구경 오기도 했다. (겸손한 게 아니라 잡곡밥에 시금치 볶음, 애호박 볶음, 샐러드 정도였다) 역시 코리안이라 요리를 잘하는 거냐며 나를 진정 쑥스럽게 만들었다. 자기는 메이드가 없으면 외식만 한다는 동료,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서 밥은 시어머니가 도맡아 해 주신다는 동료 등 사연은 다양했지만 내가 보기엔 이들은 그동안 굳이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저 안 했을 뿐이었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메이드와 외식문화가 발달했으니 말이다.


외모를 꾸미는 것도, 요리를 하는 것도 싱가포르에선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물론 어느 사회나 외모가 더 뛰어나면 이성에게 인기가 많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 요리를 잘하면 주위 사람들도 즐겁게 해 줄 수 있고 더 매력적인 사람으로 느껴진다. 누군들 호감형 외모에 요리도 잘하는 사람을 싫다 하랴.

하지만 내가 느낀 차이점은 한국에선 여성들이 굳이 자신은 관심이 없거나 하고 싶지 않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성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라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억지로 노력하는 경우가 있다면 싱가포르의 자매님들은 좀 더 그런 이유로부터는 자유로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여자로 살기 편하다고 느낀 점은 싱가포르는 "여자니까 밤에는 조심해야 해, 밤에 돌아다닌 여자가 잘못이지."라는 비난을 듣는 것이 아니라, 밤 11시에도 여성들이 밖에서 러닝을 즐길 만큼 안전하게 느끼는 사회이기도 하다. 한국에선 택시를 타는 것도 무섭게 느껴졌는데 말이다. 물론 싱가포르도 사람 사는 곳이니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일어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늦은 시간에도 밖에서 운동을 하는 여성들이 많고 7년 동안 거주하면서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안전하다고 느꼈다.


어디서든 남의 시선을 아예 의식하지 않고 살 수야 있겠냐만은, 적어도 한국에서보다는 싱가포르에서의 삶이 더 편안하게 느껴진 것은 확실하다. 여자로서, 그것도 아시아 여자로서 외국에 살면서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얼마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건 싱가포르에서 만난 자매님들이 공통적으로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좀 더 많은 자매님들께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이왕 일할 거라면, 좀 더 편하게, 인정받으며, 마음 맞는 자매님들과 즐겁게 살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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