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리카 Aug 13. 2020

싱가포르에는 지옥철이 없다

교통 시스템 이야기

서울에서는 사실 아주 잠깐 일했을 뿐이지만, 그 잠깐 동안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꿈에서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아침 출근길의 지하철 안 풍경이다.


나는 대구 출신으로 운 좋게도 초등학교부터 심지어 대학교까지 전부 걸어서 다니거나 자전거로 다닐 수 있는 거리에서 통학을 했었다. 게다가 대구는 우리나라의 제3의 도시라도 대중교통이 웬만해선 그렇게 붐비지 않는다. 출퇴근 시간에도 물론 교통체증은 있지만 서울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게다가 정말 급한 경우라면 택시를 이용해도 크게 부담되지 않는 비용 안에서 해결이 되니 택시 이용도 많이 하는 편. 그래서 서울과 도쿄의 지하철은 나에겐 더욱더 충격과 공포였던 것 같다.


잠시 다닌 회사는 논현동이었고 나는 나름 강남과 강북을 다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살 집은 신촌에 구했었다. 그 땐 나도 어렸고 왠지 학생들이 많은 곳이니 재밌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때의 나에게 묻고 싶다. 나 녀석 그게 정말 최선이었니라고...) 그 댓가로 매일 아침 2호선을 타고 환승을 하며 출근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출근길이 아마도 서울 생활에 빨리 질려버리게 한 장본인이 아닌가 싶다.


예전 도쿄에서 겪었던 그 끔찍한 지옥철이 서울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다행히 변태는 적었지만! 도쿄의 지옥철과 마찬가지로 서서 잠을 자는 사람들, 마치 영혼이 없는 좀비 같은 이들이 서로의 몸에 기대어 지하철 안을 꽉 메우고 있었다. 나는 생판 남인 사람과 거의 얼굴을 맞대고 한껏 웅크린 채로 다음 역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이동해야 할 때면 '아니 진짜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라는 생각이 수십 번도 더 들었다.


그 괴로운 시간이 지나고 겨우 논현역에 도착하면 다들 엄청난 기세의 전투적인 파워워킹으로 각자의 회사로 걸어갔다. 집을 나서 거의 한 시간 만에 내 자리에 겨우 앉으면 나는 이미 기가 다 빨린 상태였다. 아침을 아무리 든든히 먹어도 소용없었다. 그냥 나는 이미 그 지하철 안에서 기력을 소진했던 거다.

싱가포르 MRT 노선도 © LTA

싱가포르에 살면서 가장 좋았던 건, 아침 출근 길이 그렇게 괴롭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적한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정말 싱가포르 생활의 만족도는 급격하게 올라갔다 .

나름 시외로 통하는 동쪽 끝자락 동네에 살면서 시티로 출근하는데도 MRT로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데다 싱가포르 사람들이 아무리 꽉 찼다고 괴롭다고 호소하는 수준이라도 이미 서울의 2호선 출근길을 경험해본 나에게는 미소가 나올 정도로 쾌적한 수준이었다. (여기서 왠지 모를 2호선 부심...)

싱가포르의 MRT. 출퇴근 시간엔 물론 이것보다 붐빈다 ©에리카

싱가포르에서 가장 많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은 MRT라는 시스템으로 Mass Rapid Transit의 약자다. 2020년 8월 기준으로 총 5개 노선이 운영 중인데 지금도 열심히 새로운 라인을 건설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개통한 남북선 NSL, 동서선 EWL을 (각각 라인을 나타내는 색깔이 레드, 그린이라 간단하게 레드라인, 그린라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용하면 싱가포르의 웬만한 대표 장소들로는 이동이 가능한데 사이사이 부족한 부분은 다른 라인들이 하나씩 생기면서 그 간격을 메우고 있다. 요금은 거리에 따라 달라지지만 성인 기준 최소 $0.92에서 최대 $2.17 수준으로 한화로는 800원에서 1900원 정도로 저렴한 편이다.


우리나라처럼 카드에 금액을 충전해 사용하면 간편하게 버스나 다른 LRT(경전철, 외곽지역을 연결하는데 이용된다)로 환승을 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대중교통은 가장 오래된 라인인 레드라인이라도 1987년에 개통됐을 정도로 대부분이 신식이라 깨끗하고 쾌적하다. 사실 워낙 엄격한 법 때문에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은 물론 물을 마시는 것도 안될 정도로 관리하기 때문에 더 유지가 잘 되는 부분도 있다. 재미있는 법은 과일의 왕이라고 불리는, 귀한 과일이지만 냄새가 썩은 양말... 에 비유되는 듀리안은 대중교통에 들고 탈 수 없다는 것.

MRT 내부에 붙어있는 사인 ©에리카


싱가포르 생활 초기 시절, 밖에서 땀을 뻘뻘 흘리다 시원한 MRT에 타서는 별생각 없이 물을 마시려고 할 때였다. 옆에 앉아있던 싱가포리언 아주머니가 아주 단호하게 "No drinking!"이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도 무안한 장면인데... 그때 이후로는 아무리 목이 말라도 괜히 또 한 소리 들을까 싶어 참곤 했다. 다른 편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싱가포르에선 하지 말라면 그냥 안 하는 게 본인에게 이로모로 좋다.


싱가포르의 2층 버스 ©https://sg.news.yahoo.com/


MRT 다음으로 많이 이용하는 건 버스. 싱가포르 또한 홍콩처럼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향을 받아 2층 버스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2층의 앞좌석에 앉으면 싱가포르를 둘러보는 투어버스 못지않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개인적으로는 2층 버스를 참 좋아한다. 1층에는 현재 2층 좌석이 얼마나 비어있는지 보여주는 전광판이 있어서 만석이라면 굳이 올라가 보지 않아도 편하게 확인할 수 있어 좋다.


버스는 집에서 MRT역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에 역까지 가기 위해 이용하거나 아예 환승하는 대신 편하게 앉아서 가기 위해서 타는 경우가 많은데 MRT보다는 좀 더 여유가 느껴지는, 창 밖 풍경을 구경할 수 있어 버스를 좋아한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따로 안내방송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여행자라면 구글맵을 켜고 계속해서 확인해야 하는 정도일까. 버스 요금 또한 5.2km 기준 현금으로 $1.90 (한화 1,650원 정도)이니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시간대에 비하면 싱가포르도 출근길엔 붐비기 마련이다. 하지만 배차 간격이 짧아 한 대를 놓치더라도 금세 다음 MRT나 버스가 오는 데다 정말 최대치로 붐비는 순간이라 할지라도 서울의 프로 출근러들에게는 쾌적하게 느껴지는 수준이니 걱정 마시라. 서울은 우리를 참 강하게 해주는 부트 캠프인 것 같다. 서울이나 도쿄에서 출퇴근을 해본 이들이라면 정말 이미 빡세게 훈련을 받은 셈이다.


이 글을 빌어 서울에 계신 형제자매님들, 그러니 그대들은 정말 강인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대들은 이미 전 세계 어디서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이다.



이전 16화 이 나라, 참 여자가 살기 편하구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