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대학을 졸업한 상태에서 별다른 경력이 없는 사회 초년생은 내가 뭘 잘하는지, 하고 싶은 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물론 의대나 전문지식을 요하는 특정한 전공의 경우에는 졸업과 동시에 별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전공을 살려서 커리어를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관심사가 다양하고, '난 이것 아니면 안 돼!'가 아니라 어떤 일이라도 큰 거부감 없이 한 번쯤 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많은 경우라면 삶이 이끄는 대로 스스로를 맡겨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이끄는 대로 가보는 인생은 남들이 보기에는 무계획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아예 힘을 빼고 물살의 흐름에 맡기는 것이 때로는 더 쉽게 나를 목적지로 안내해준다.
나의 경우에는 '이것 아니면 안 돼'도 없었고 '이건 꼭 해보고 싶어'라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당장 가진 능력, 스킬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그 일을 해보자라고 생각했다. 이 넓은 세상에 설마 내가 필요한 곳이 한 군데도 없을까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한국으로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범위를 넓히면 (솔직하게 치안이 걱정되는 몇몇 국가는 제외하고) 기회는 무궁무진하게 느껴졌다. 사지육신이 멀쩡하고, 명색이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데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 정도 조건은 엄청난 스펙과 인턴 경력을 자랑하는 이들에 비하면 정말 평범한 수준이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려주는 경험들을 많이 해야 한다. 삶이 나를 어떻게 안내할까라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면 참 흥미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내 지식, 경험으로는 상상할 수 없던 힌트를 툭툭 던져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더 자주 그런 힌트들이 나타난다.
생각지도 못했던 나라인 싱가포르에서 취업을 하고, 감사한 첫 직장 생활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정확한 정답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는 못하지만 오답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다 보면 언젠간 정답이 남게 되는 방법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직을 준비하면서 나는 또 한 번 내맡기기를 실험해보기로 했다. 첫 직장을 소개해준 일본 취업 에이전시인 JAC의 홍콩 지점장 야노 상에게 연락을 드려 상황을 설명하고 상담을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JAC의 싱가포르 지사의 담당자분을 소개받았고, 나는 그 분과의 상담을 통해 메리어트 베케이션 클럽에서 쌓은 업무 경력, 더 성장한 일본어와 영어 실력, 그리고 이제는 싱가포르에서 일한 경력 1년 반이 더해져 훨씬 더 선택지가 많아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류상으로 내가 1년 반이라는 경력이 더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이제는 자신 있게 일본어와 영어로 정말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었다. 토익이 몇 점이고, JLPT 1급을 땄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이젠 진짜로 클라이언트와 이메일로 대화하고, 동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상사와 조율을 하고, 돈을 내고 배우는 학생의 입장이 아니라 회사에 보탬이 되고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정정당당히 나의 가치를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력서에 추가된 한줄보다 그게 더 중요했다.
리쿠르터 분과 상담을 하면서 나는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 나를 원하는 곳이라면 어떤 회사도 포지션에도 오픈되어있다고, 가능성을 보고 싶다고 전했다. 그러자 리쿠르터 분은 화색을 띄며 다양한 업계의 일본어 가능자를 모집하는 포지션을 한 묶음 출력해 보여주었다. 글로벌 회사들의 아시아 퍼시픽의 본사가 싱가포르에 있는 만큼, 누구나 알법한 큰 회사들이 많았다. 한국이었다면 엄청난 경쟁을 뚫어야만 입사할 수 있는 그런 회사들이었다. 나는 합격여부를 떠나 남들이 다 가는 큰길이 아닌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선택한 옆길이 보여주는 이 생각지 못한 전개가 참 흥미롭다 생각했다.
다양한 포지션 중에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일본의 경제를 책임지는 대기업 중 하나인 미츠비시 그룹의 건축설계사업부였다. 싱가포르에 지사를 오픈하면서 처음 부임하는 CEO의 직속비서를 찾고 있었는데, 단순한 비서가 아닌 CEO와 함께 일당백으로 마케팅, 세일즈, 사업개발, 현지의 건축규정에 대한 조사와 리포트를 포함해 앞으로 파견되어 올 건축가들을 위한 밑바탕을 만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싱가포르 지사의 담당자가 되어 모든 업무를 책임지고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나에게는 다양한 포지션을 다 경험해볼 수 있는 둘도 없는 엄청난 기회로 느껴졌다. 리쿠르터 분은 타이틀이 비서라 여성 지원자들이 많았지만 실제로 업무내용을 알고나면 일본인 여성들 중에는 이런 포지션을 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적임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이 포지션이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았다. 저 업무를 다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해서 리쿠르터 분의 적극적인 서포트와 함께 지원을 하게 되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류를 제출하고 바로 그다음 날 면접을 보고, 몇 시간 안에 합격통보를 받았다. 기쁜 목소리로 합격을 전하는 리쿠르터 분의 진심이 느껴졌다.
나의 보스가 될 사람은 오사카 출신의 시원시원한 성격의 토바 상이었다. 토바 상은 오사카 역을 포함해 미츠비시에서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이끌어 온 이탈리아 유학파 출신의 실력 있는 건축가였다. 그래서 싱가포르 지사의 CEO로도 발령이 된 것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건축에 관심이 많아 독학으로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했고 현대건축으로 잘 알려진 싱가포르의 건축물들에 대해 1년 반 정도 사는 동안 꽤 많이 알게 된 상태였다.
면접에서 전공이 건축은 아니더라도 그런 부분을 어필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메리어트 베케이션 클럽의 일본인 팀에서 일을 하며 비즈니스 일본어와 매너에 익숙한 점, 우수사원상을 받은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 또한 내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마음에 든다며 토바 상은 한 팀이 되어 싱가포르 지사를 잘 키워나가보자고 했다. 업무량이 많을테니 각오하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야기했지만 나는 내가 앞으로 배워나갈 것들에 대한 기대로 신경쓰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건축업계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싱가포르의 첫 업무 경험과 내가 좋아서 혼자 공부했던 것들이 합쳐지고, 절묘한 타이밍에 이 포지션이 나오면서 모든 것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직업인 건축가와 그것도 직속 상사와 부하로서 함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이 업무를 하며 정말 많이 배웠고 성장했고, 이때의 경험이 내가 싱가포르의 건축에 대해 글을 쓸 수 있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다면 오피스는 어디였을까?
바로 내가 꼭 오겠다고 다짐했던 그 래플스 플레이스 Raffles Place의, 그것도 중심에 위치한 빌딩이었다. 대표적인 그린건축으로 유명한 식스 배터리 로드 Six Battery Road 빌딩. 내가 원했던 모든 조건이 충족되는 일이었다.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내가 배우며 성장할 수 있는 환경, 게다가 래플스 플레이스에 위치한 오피스까지.
나는 이 모든 것이 내가 삶을 믿고 그저 내맡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믿는다.
삶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알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