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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Mar 10. 2020

싱가포르 걸의 완벽한 핏에 담긴 비밀

명품 디자이너가 디자인하면 유니폼도 특별해진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항공권을 구입하는 것만으로도 준비의 반은 끝난 기분이다. 많고 많은 비행 편중에서 내 일정에 맞는,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항공사의 티켓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여행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예쁜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들의 친절한 서비스를 받으며 평소 아껴두었던 영화도 보고 책도 읽는 시간 또한 여행의 일부이니 말이다.  


항공사의 대외적 이미지를 결정하는 요소 중에 가장 먼저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승무원들의 유니폼이다. 그중에서도 1970년대부터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유니폼이 있다면 바로 싱가포르의 국영 항공사, 싱가포르 항공의 사롱 케바야 Sarong Kebaya (동남아 지역에서 입는 크고 긴 천을 허리에 감싸는 형태의 전통의상)가 아닐까 싶다.  

싱가포르 항공의 유니폼을 입은 싱가포르 걸 © Singapore Airlines

싱가포르 걸은 싱가포르 항공의 승무원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브랜드를 대표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차원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유명한 싱가포르 항공은 ‘아시아식 환대’라는 이미지를 잘 구축했는데, 승무원들의 독특한 유니폼 또한 그 브랜딩의 일부이다. 


동양미를 느낄 수 있는 이 유니폼은 바틱 문양이 새겨진 독특한 사롱으로 디자인되었다. 바틱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패턴으로 장인이 수공으로 염색하는 면직 의류의 기법으로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있다. 

손수 하나하나 밑그림을 그린다 ©unsplash

바틱 장인들은 바틱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데 이들은 뜨거운 밀랍으로 천에 점과 선 등을 이용해 모티프를 그린다. 바틱에는 아랍의 서예, 유럽의 꽃다발, 중국의 불사조, 일본의 벚꽃 등 세계 각국의 다양한 영향을 받은 다채로운 소재들이 사용되는데 이들 국가가 주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무역의 허브였던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피에르 발망과 캐빈 크루이자 모델© Singapore Airlines

싱가포르 걸들의 유니폼은 1968년에 오뜨 꾸뛰르 디자이너 피에르 발망이 디자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행을 타지 않는 실루엣을 택한 덕분에 초기 디자인을 크게 변형하지 않고도 지금까지 여전히 지켜가고 있다. 패턴, 라인, 원단 모두 50년 이상 지난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항공업계에서도 이례적인 일. 

발망의 최초 디자인© Singapore Airlines
당시 모델이었던 See Biew Wah © Singapore Airlines

발망이 유니폼을 위해 선택한 사롱 디자인은 크고 긴 천을 허리에 감아서 싸는 형태이다. 전통적인 사롱은 몸의 실루엣을 강조하지 않지만 싱가포르 항공의 유니폼은 스탠더드 사이즈가 없고, 한 명 한 명의 몸에 딱 맞도록 만들어지는 맞춤복이다. 완벽한 핏을 중요시 생각하는 발망이 디자인을 할 때 강조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바틱 문양은 전통적 가치를 나타내기에 가장 좋은 패턴이라고 생각했다. 


초기 디자인이 완성되었을 때 발망은 당시 크루 중 한 명이었던 시 비유 와 See Biew Wah에게 유니폼을 입혀 파리 비행을 경험하게 해 실제로 업무를 할 때 불편함은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해 수정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현재의 싱가포르 걸의 실루엣이다. 

피에르 발망과 모델© Singapore Airlines

그 이후 조금씩 라인과 디테일의 업데이트는 있었지만 스튜어디스의 직급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는 네 가지 컬러는 변함없이 싱가포르 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포지션에 따라 다른 유니폼 패턴 © Singapore Airlines
대표 유니폼 ©news.abs-cbn.com

승무원들은 직급에 따라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남색 바틱은 이코노미 클래스를 담당하는 크루들의 유니폼이다. 남색 바탕에 밝은 색의 꽃 모티프와 알록달록한 라인이 강조된 패턴은 싱가포르의 전통 기념품 등에도 자주 사용된다. 


직급에 따라 달라지는 유니폼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아이섀도와 립스틱 색도 달라진다. 랭킹이 높은 승무원일수록 사용할 수 있는 색이 많아진다고. 손톱은 유니폼과 대비되는 새빨간 레드로 통일한다.  

싱가포르 항공 승무원©news.abs-cbn.com

싱가포르 항공은 유니폼이 만들어내는 영향력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브랜딩과 마케팅에 잘 활용한 좋은 예이다. 첫 모델이었던 시 비유 와 See Biew Wah는 한 인터뷰에서 전신이었던 말레이시아 항공에서 새로운 브랜드인 싱가포르 항공으로 재탄생했을 때, 이 항공사의 서비스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사롱 케바야를 입은 싱가포르 걸들이 공항에 나타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단순히 한 항공사의 유니폼에서 나아가 전 세계 여행자들에게 ‘싱가포르’라는 정체성을 각인시킨 디자인인 셈이다. 


디자이너 발망이 전통의 의미를 전달하기에 좋은 소재로 선택한 바틱. 전통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르는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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