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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 Mar 25. 2020

엄마의 환갑이 나를 살렸다

어느 고집쟁이 불효녀의 반성기

이제는 유럽에서 새로운 챕터를 살아보겠다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7여 년 정도의 싱가포르 생활을 정리하고 작년 연말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두 달 정도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바로 베를린으로 갈 예정이었다. '영감의 도시'에서 계속해서 글도 쓰고 사진도 찍고, 독일어도 배우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물 흐르듯이 살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도 신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씩씩하고 막무가내인 나도 추운 겨울에 어두컴컴한 베를린에 가서 집을 구하고, 적응할 생각을 하니 영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래, 조금만 따뜻해지면 가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올해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3월의 엄마의 환갑과 8월의 아빠의 환갑. 동갑내기 부부인 부모님의 환갑이 있는 해다. 아무리 자기밖에 모르는 불효녀라도 부모님의 환갑을 함께 보내지 않는 건 좀 아니니까...'그래, 3월에 엄마 환갑만 일단 함께 보내고 가자.'라며 출국 날짜를 늦췄다. 부모님이 정말로 많이 좋아하셨다. 엄마는 살짝 눈물도 비치셨다. '네가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슬펐는데 그래도 한동안은 괜찮겠다.'라며.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생각지도 못했던 코로나라는 녀석이 대구를 덮쳤다. 대구 사람은 입국을 거부하는 나라가 하나씩 뉴스에 나오기 시작했고 나는 일정을 당겨서 서둘러 출국을 할지, 아님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부모님은 유럽에서 인종차별을 당한 아시안의 뉴스를 보시고는 이런 상황인데 어딜 가냐고 하셨다. 혼자서 너를 먼 타지에 다시 보내는 것도 힘든데,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얼마나 더 걱정을 해야 하냐고 하셨다. 나 역시도 지금 이 타이밍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당분간 집에서 상황을 보기로 했고, 그 뒤로 유럽의 상황은 급격하게 나빠지기만 했다. 그때 무리해서 서둘러 출국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엄마의 환갑 때문에 날짜를 늦춘 게 신의 한 수였다.



며칠 전 엄마의 환갑을 치렀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가족끼리 조촐하게, 그래도 누구 하나 빠진 사람 없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초도 불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었다. 비싼 선물은 못 해 드렸지만 반지 하나로 엄마는 너무 행복해하셨고 나와 남동생이 준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도 좋아하셨다. 그래도 무엇보다 우리 딸이 같이 있어 행복하다고 하셨다. 이대로 한국에서 오손도손 이렇게 살면 소원이 없겠다고. 그러고는 또다시 눈물을 보이셨다.


만감이 교차했다. 하고 싶은 건 꼭 하고 마는 고집쟁이인 나는, 생각보다도 더 많이 이기적이었던 건 아닐까.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부모님을 이렇게 슬프게 하는지. 가족보다 중요한 게 대체 무엇인지란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부모님 곁에 있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사실 빨리 결혼하라는 성화만 없으면 집이 최고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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