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익숙한 곳에서 그곳의 문화를 엿보다
우리가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어떤 겉치레도 하지 않고 우리 본연의 모습대로 있을 수 있는 장소. 놓인 소지품, 물건이 정리된 방식, 인테리어에 사용된 소재, 색감 등으로 그곳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상상해볼 수 있는 곳. 바로 우리의 집이다.
콘크리트 벽안에 빼곡히 같은 크기의 사각형 집이 들어서 있는 아파트일지라도 각 가정의 집안은 들여다보면 제각각 다른 모습이다.
그렇게 한 나라의 문화라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보통 사람들의 개성이 묻어나는 집안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
싱가포르 거주 17년 차인 일본인 예술가 커플 에이타로와 타마에는 본인들이 살던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새로 이사 갈 곳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커가는 두 딸과 함께 네 식구가 살만한 괜찮은 집을 사기에는 개인 소유의 콘도는 그들의 예산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렇다고 싱가포르인의 80%가 거주하는 공공아파트인 HDB(Housing and Development Board)는 예술가인 그들의 눈에는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미래도시의 거주형태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 싱가 포리언 친구 커플의 집에 초대되어 방문했을 때 그들의 편견은 깨졌다.
싱가포르의 HDB는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내부 인테리어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조심스러워해 일반가정의 리노베이션 공사가 흔치 않은 일본과는 달리 싱가포르에서는 ‘공사 때문에 몇 달간 시끄러울 것이니 이해 부탁드린다’라는 쪽지 하나로 대부분의 이웃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한다는 사회분위기가 신기했다.
HDB의 복도를 걷다 보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집들이 여기저기 보였고 이웃들은 서로의 집을 마치 제집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며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점점 더 HDB 가 단순히 재미없는 디자인의 공공아파트가 아니라 싱가포리언들의 살아있는 삶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 싱가포르 국립대학의 건축학과로 부임해온 건축가이자 교수인 토모히사를 만나게 되었고, 싱가포리언들의 집인 HDB의 모습을 기록하는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꺼냈다.
토모히사는 싱가포르에 대해 아직 전혀 몰랐지만 책을 내는 방법을 알았고, 에이타로와 타마에 커플은 책을 내는 방법은 몰랐지만 기꺼이 자신의 집을 보여줄 싱가포리언 친구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완벽한 매치였다.
그렇게 그들은 친구의 친구의 소개로 매주 싱가포르 사람들의 집을 방문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각 공간의 개성은 그 집의 주인의 스토리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사진으로 담아내는 것 이외에 집주인의 이야기를 담았고, 그 과정을 4년 동안 이어나갔다. 그렇게 찍은 집들이 100곳이 넘었다.
차곡차곡 모은 사진들로 전시회를 열고 사람들을 맞이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공간. 그의 어머니를 위한 마사지체어가 놓여있다.
말레이 아티스트와 그의 가족의 집. 에이타로는 이 집을 생동감 있고 컬러가 가득한 곳으로 묘사했다.
전직 소방관이자 현재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집. 집안의 거의 대부분은 직접 만들고 고친다.
목수의 집. 에이타로는 “그의 집을 향한 열정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요. 그의 집을 구경하다 보면 길을 잃을 수도 있죠.”라고 한다.
HDB 플랫의 최고층에 위치한 뮤지션의 집. 마치 공중에 떠있는 듯하다.
아티스트 커플의 공간. 아이디어 구상이나 창의적인 일을 할 때 필요한 그들만의 안식처로 꾸몄다.
레트로 한 분위기와는 대조되는 최첨단 시큐리티를 갖추고 있는 집.
젊은 건축가 부부의 집. 아이가 태어난 후 놀이공간을 중요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근처에는 오래된 커뮤니티가 있어 느낄 수 있는 그 정겨운 정취가 좋다고.
아트 선생님이자 에이타로의 친구의 집. 가장 처음으로 방문한 HDB 플랫.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영감을 받은 곳이다.
판화 제작가와 그녀의 가족의 집. 모든 가족 구성원이 이 공간에서 많은 것을 함께 한다고.
평소 모습이 옹기종기 놓인 그들의 책상에서 묻어난다.
예술작품들로 가득한 컬렉터의 집.
장난감과 프라모델을 좋아하는 뉴스 에디터의 집. 정작 그녀는 바쁜 업무로 이 공간을 즐길 시간이 부족하다.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들의 일상의 공간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낸 이 일본인들에게 싱가포르 사람들은 고마움을 느꼈고 디자인계에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전시회는 좋은 호응을 얻었다.
3인방은 전시회와 함께 이 사진들을 엮어 <HDB: Homes of Singapore>이라는 책을 펴내기 위해 크라우드펀딩을 시작했고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총 588 pages (30 x 30 cm)의 하드커버의 이 책에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싱가포르의 일상적인 모습이 가득 담겨있다. 보통의 싱가포르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접할 기회가 없었던 일본인들에게 이 책을 꼭 보여주고 싶다는 이 3인방의 바람으로 <HDB: Homes of Singapore>는 영어, 중국어와 함께 일본어 본문이 포함되어 있고 싱가포르에 이어 일본에서도 출간되었다.
문화라는 것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집안, 우리의 거실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믿는 에이타로의 말처럼 이 책은 멀라이언, 마리나 베이 샌즈처럼 관광명소로만 알려진 싱가포르가 아닌 ‘진짜' 싱가포르를 엿볼 수 있는 렌즈가 되어주었다. 때때로 우리는 이렇게 타인들의 시선을 빌려 우리에겐 익숙했던 모습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