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할 때도 유명한 여행지를 찾아가는 것보다는 그 나라 사람들이 평소에 어떻게 사는지를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출근길에는 사람들이 무슨 책을 읽는지, 마트에서는 옆의 아주머니가 장바구니에 뭘 담는지, 펍에서는 남자들이 여자한테 어떻게 접근하는지(암스테르담에서는 여자가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내가 그 나라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경우에는 친구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안 듣는 척하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곤 한다. 세상 어디든 결국엔 다 사람 사는 곳이니 어디나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래도 관찰을 하다 보면 흥미로운 부분들이 보이곤 한다.
일본에서 지낸 시간은 나에게는 본격적인 탐구생활 기간이었다. 마치 스파이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그들의 사회에 섞여 살면서 일본, 일본인이라는 대상을 바로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파브르가 곤충 일기를 쓰듯(?) 내 안에서는 차곡차곡 조금씩 데이터들이 쌓여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알아가는 과정이 참 즐겁고 흥미로웠다. 여행을 하면서 단편적으로밖에 관찰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것은 마치 연애를 할 때는 정돈된 모습만 보다가 결혼을 하면 진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본 일본은 그전까지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히 흥미로운 문화의 태생지만은 아니었다. 이 나라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배울 점이 많았다. 가끔은 그게 부럽고 얄밉기도 했고, 그럴수록 더 많이 배워서 내 것으로 만들고 좀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겠다란 나름 비장한 각오도 했었다. 무엇보다 이 사회에서는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에서는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되던) 가치관이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일본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마도 "남에게 폐 끼치지 마."가 아닐까 싶다. 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 가끔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하게 행동을 조심시키는 모습을 볼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아이들이 측은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릴 적부터 그런 교육을 받는 것이 당연한 덕분에 일본에서는 아이들이 밖에서 떼를 쓰거나 소란을 피워서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모습은 거의 보기 어렵다. 아이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제대로 교육하지 않은 부모가 비난받는 분위기이고, 기본적으로 일본인들은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간혹 한국인들 중에서 아이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이유로 이런 교육방식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는 기본적으로 자유이지만 그 전제조건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어릴 때부터 제대로 배워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것이 얼핏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 한국에서는 의외로 그렇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오히려 불편해하는 사람이 '예민한 사람', '자기 애들 기죽이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점점 더 자기중심적인 아이들이 많아지고 관련 뉴스가 자주 들려오는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아이들에게 타인에 대한 배려를 제대로 교육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해 보인다. 그 외에도 일본인들의 정말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쓰는 장인정신, 가끔은 융통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규칙은 규칙으로 철저히 지켜 사고나 미스를 미연에 방지하는 점 등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공부가 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일본 사회의 경직성에 숨이 막힐 때도 있었다.
내가 그동안 잡지에서 봐왔던 자유분방한 패션을 한 일본인들은 사실은 이 사회에서도 일부였고 대부분은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대학생들은 본격적인 취업활동(줄여서 '슈카츠'라고 한다)을 시작할 때면 그전까지 샛노랗거나 빨간 머리였던 학생들도 새카맣게 염색을 하고, 모두가 똑같은 일명 '리쿠르트 슈트'를 입고 사이즈조차 규격이 정해진 것 같은 검은 서류가방을 어깨에 메고 면접을 보러 다니는 모습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처음엔 이런 모습이 살짝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도 물론 취업 메이크업, 헤어처럼 대부분이 정해진 룰을 따르긴 하지만 내 상상 속 일본은 '자유롭고 개성이 인정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처음 봤을 때 오히려 그 충격이 컸던 것 같다.
또 한 가지 의외였던 점은 이상하리만치 낮은 일본 여성들의 여권이었다. 일본의 여성 패션지를 보다 보면 "남자가 좋아하는 향수", "남자가 보면 설레는 아이템", "미팅에서 점수 따는 화법" 등 남성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되는 기사가 많았고, 손수건을 건네는 타이밍이나 휴지는 케이스에 넣어서 들고 다녀야 조신해 보인다 등 그 디테일이 놀라울 정도였다. 사실 이성에게 어필하는 방법은 국적 연령 불문하고 인기 있는 주제이긴 하지만 한국과 비교했을 때 일본 여성들은 좀 더 '선택받기 위한' 방법에 집중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게다가 밤 11시만 넘으면 깜짝 놀랄 수위의 방송들이 버젓이 공중파에서 방송되기 시작했는데, 여자 출연자들은 비키니 차림으로 출연하는 건 기본이고 남자 진행자들이 가슴을 만지거나 신체 특정 부위를 클로즈업을 하는 등 당시의 나로서는 이게 공중파 방송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 충격적인 문화였다. 사실 일본이 전반적으로 성에 개방적인 사회란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보이는 모습 또한 여성은 대단히 수동적이고, 남성이 짓궂게 성적인 농담을 하더라도 부끄러워하거나 웃으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말로 애니메이션에서처럼 "꺄~ 싫어, 너무해~."라는 리액션을 하는 걸 보고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대부분의 여성이 '수줍어하는 소녀'같은 태도를 지향하는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고, 왠지 불편했다.
한국에서도 여전히 남녀불평등이 문제로 거론되지만, 한국 여성들은 그런 불평등에 목소리를 내고 여성성을 강요하는 남성들을 향해 그건 옳지 않다고 항의한다면, 일본 여성들은 불평등하다거나 차별이라고 스스로 인식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오히려 자신들 스스로 "그건 너무 여성스럽지 못해",혹은 "그렇게 해서까지 커리어를 쌓고 싶지 않아"라고 하는 분위기랄까. 해외생활을 했거나 이런 문제를 의식하고 있는 소수의 여성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본 여성은 착하고 다정다감하고 언제나 완벽한 메이크업과 헤어 세팅, 패션센스를 자랑하고 (온몸이 완벽히 제모된 것도 필수), 결혼 후에는 밤에는 남편을 만족시키고 아침 밥상에는 완벽한 계란말이를 선보이고 아이들에게는 친구들이 부러워할만한 도시락을 싸주는 엄마가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여겨지는 듯했다.
사실 일본 남성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남성들이 일본 여성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내가 남자라도 저런 여성이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혼또니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다) 다만 이번 생에 여자로 태어난 나는 그런 여성이 될 수 없고, 굳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일본은 유학생으로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는 좋은 곳이었지만, 외국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별로 매력적인 곳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나는 한국의 대학교 또한 휴학을 해놓은 상태라 한동안 자퇴를 하고 다시 도쿄에서 대학을 갈까 고민을 한 적도 있었지만 일단 졸업은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2년 반 동안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도쿄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학교에 복학하기 위해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일본과의 인연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