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만 낯익은 디자인
전통 - 퓨전.
패션, 요리, 건축 등 문화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할 때 두 부류로 의견이 나뉜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통은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부류와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부류. 하지만 흥미로운 스타일은 언제나 다른 문화들이 만나 섞였을 때 생겨난다.
시작은 각각 달랐다. 그저 막연히 새 출발을 위해서,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선장의 이야기에 무작정 배를 탔거나, 혹은 원치 않는 강제이동이건. 하지만 도착한 곳은 같았다. 보잘것없던 작은 섬나라였지만 이제는 동남아시아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나라 싱가포르.
중국에서, 말레이시아에서, 인도에서,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게 그들이 함께 만들어낸 나라 싱가포르는 다양성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중국 대륙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남자와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진 현지의 말레이 여자. 그들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일구었다. 그렇게 중국의 문화와 말레이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합되었고 인종, 음식, 건축, 언어, 의복 모든 면에 걸쳐 새로운 문화가 탄생했다. ‘현지에서 태어난’이라는 뜻의 말레이어로 페라나칸 Peranaka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인도, 인도네시아, 태국,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문화도 함께 가미되었다.
그리고 이 독특하고도 묘한 문화는 그들의 선조처럼 생명력이 강했고 훗날 싱가포르의 뿌리가 되었다.
페라나칸 스타일의 특징은 화려한 색감에 중국의 전통 꽃, 동물 문양이 합쳐져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자연스럽게 집안 장식에도, 건물에도, 간판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싱가포르 길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1층은 상가건물, 2층은 가정집으로 사용되는 컬러풀한 샵 하우스는 페라나칸 스타일의 정수다.
동양과 서양의 건축 스타일이 만난 페라나칸 하우스는 코린트 양식 기둥, 지중해식 창문과 덧문, 중국식 유약 타일 등 다양한 문화가 혼재되어 있다. 페라나칸 스타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일 장식은 흔히 마조리카 타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영국, 독일, 벨기에에서 유행했다.
1891년 처음 유럽인들에 의해 무역으로 싱가포르에 들어온 타일은 중국인들의 집 장식에 사용되었고 자연스레 페라나칸 문화에 전달되었다.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타일들은 예술품 경매에서 한 장당 몇백만 원을 호가할 정도의 가치로 평가되며 유네스코에서 싱가포르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최근 싱가포르 디자인계에서는 젊은 감각으로 재해석한 타일을 이용한 인테리어가 자주 소개되며 다시 한번 페라나칸 타일이 주목받고 있다.
경쾌한 파란색과 연두색 타일의 조화가 더운 열대지방의 날씨와 잘 어울린다. 패턴이 다른 타일을 한 공간에 다양하게 사용해 자칫 복잡해 보일 수도 있지만 서로의 색깔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잘 어우러진다.
이 집은 실제로 40대 페라나칸 부부가 그들이 수집해온 아이템들과 타일들로 꾸민 모던한 페라나칸 하우스. 싱가포르의 디자인 사무실 리니어 스페이스 콘셉트 LINEAR SPACE CONCEPTS을 운영하는 크레이티브 디렉터 마크는 부부의 요청대로 페라나칸 스타일의 플라워 패턴과 타일을 활용하되 모던함을 유지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넓은 키친에 터키 블루색 타일로 시원함을 더해 한층 더 탁 트인 느낌의 공간을 연출했다.
다양한 색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페라나칸 스타일에서 조금 색을 줄여 블루, 옐로, 레드에 집중했다. 하지만 화려한 조각은 강약을 조절해 배치해 여전히 페라나칸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 외에도 싱가포르 곳곳의 레스토랑, 카페, 호텔 등 다양한 곳에서 타일을 활용한 인테리어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전통 페라나칸 음식을 다루는 레스토랑은 물론 힙스터들의 사랑을 받는 브런치 장소 등에서 레트로 한 감성을 그들만의 젊은 감각으로 재해석한 스타일을 보는 즐거움이 있다.
간혹 평범한 건물의 복도나 길거리의 도로에도 숨겨진 페라나칸 타일들이 있으니 싱가포르를 여행하면서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최근에는 싱가포르의 기념품샵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아이템들.
밋밋한 집에 변화를 주고 싶다면 포인트로 페라나칸 타일을 장식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