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1년
사실 이날은 주택청약통장을 해지한 날이었다. 해지의 해지를 거듭한 지난 1년이지만 절대 건들지 말아야 했던 청약통장. 그렇지만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앱과 비대면으로 온갖게 다 되는 세상에서 청약통장 해지는 가까운 지점을 방문해야 한단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일전에 정기보험을 해지하고, 안 쓰던 KT 인터넷을 해지할 때 절대로 나를 놓아주지 않던 그 “고객님 너무 아까워서 그래요. “ 실랑이를 또 견뎌야 할까 봐 지레 겁을 먹었다.
국민은행 한성백제 지점, 점심시간이었다. 인당 대기시간 50분. 그저 해지만 하면 될 일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나. 신경이 곤두섰다. 내 차례가 왔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청약통장 해지하려고요.” “신분증 주시고요 ~” 생각보다 산뜻하게 내 청약통장을 놓아줬다. 뭐지 왜 이렇게 간단해? 지겹게 나를 놓아주지 않을 상상을 하고 간 터라 싱거운 해지에 섭섭할 지경이었다.
새 신을 신어서 발이 아픈 것인지, 발이 안 떨어지는 것이었는지 국민은행 한성 백제역 지점에서 가락시장까지 가는 길이 꽤 힘들었다.
어차피 청약통장이 집을 안겨줄 리 없겠지. 대출을 쓰느니 청약 통장을 깨는 게 낫겠지. 청약도 약속이라면 가장 허무맹랑한 약속 아니야? 게다가 주택 청약이라니. 그게 이행될 약속일 리 없다.
서울 사는 미혼의 여성이 아무리 청약을 오래 했다고 내 집 장만을 할 수 있을까? 은행이나 좋겠지.
나는 각종 비관주의를 영 끌 하여 청약통장 해지를 합리화했다.
그런데 가락시장에서 정아를 만나자마자 행복한 하루가 시작됐다. 가락시장 역사에 있던 거울의 말처럼.
“고객님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정아 옆에 있으면 다독임 없이도 다독여졌다. 그녀의 카리스마라고 생각한다. 퇴사 선배이자 불안의 선배는 내 퇴사를 종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이제야 온몸으로 이해하게 됐다.
이미 나보다 먼저 흔들린 사람을 곁에 둔 것은 분명 나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손재주까지 엄청난 사람이라면 흔한 고무줄로 밀가루 덩어리를 귀여운 호박으로 만들어준다. 좌우지간 이번 뇨끼 데이는 그런 청약통장 해지라는 추락을 맛보고 매캐해진 감각들을 명랑하게 일깨웠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오감이 명랑해진 경험이었다. 그래서 여러 이름을 고민하다가,
“위로 끌어올려서 뇨끼”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오늘은 어느 회사의 팀 데이 행사로 뇨끼 데이를 진행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저 기분이 다운되었다가 위로 업된 정도가 아님을,
정아와 뇨끼는 나의 구세주이자 구원이었음을 꼭 문장으로 남겨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