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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팕 Sep 07. 2022

문의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나는 내리사랑이라는 말보다는 내리 갑질이라는 말이 더 그럴싸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3차 병원이라고 불리는 대학병원에서 일을 시작한 뒤로 갖게 된 신념이다. 환자는 의사에게 의사는 간호사에게 간호사는 원무과에게 원무과는 전산실에게 분풀이가 이어 내려온다. 사실 전산실은 병원의 모든 부처로부터 컴퓨터가 안될 때, 프린터가 안될 때 원망과 볼멘소리의 대상이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전산실은 컴퓨터를 고치는 곳도 아니고 프린터를 고치는 곳도 아니라는 것. 자, 그러면 전산실은 무엇을 하는 곳이냐? 옛날이라면 종이에 수기로 기록해서 이렇게 저렇게 손으로 발로 전달했을 차트나 파일들을 데이터 베이스라는 곳을 기반으로 '전산화'하여 컴퓨터로 정보를 볼 수 있게 만든 '전산 시스템'이라는 것을 '운영'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대체로 그 볼멘소리는 사용자의 무지로 인한 자기 한탄인 경우가 많다. "이거 왜 안 돼요?"라는 문의의 저의는 지금 이것이 기능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라는 것이 아니다. "아 모르겠고 되게 해 주세요."라는 뜻이다.


신입사원이던 나는 대체로 그런 문의에서는 배제되었다. 답변 및 해결이 불가하기 때문이었다. 간혹 선배가 부재중일 때 전화를 당겨 받아 메모를 남겨놓고는 했는데, 해결의 주체가 아닌 사람이 전화를 받는 경우 볼멘소리 주체의 짜증은 더 극대화되기 때문에 20초 통화에 울고 싶어질 때도 허다했다. 그런 고객들을 핸들링하는 선배들이 존경스럽다가도 저게 내 미래인가 생각이 들면 우울해지기도 했다. 전혀 멋지지 않아 내 미래...


시간은 흘러 나도 1년 차가 되었을 때다. 1년 차라고 해봤자 사업부 교육, 부서별 교육, 소프트웨어 검정시험 교육, 사내 적응 활동 등등으로 실무의 경험은 겨우 3개월 정도 경험했을 때였다. 마침 그때가 병원 전체적으로 시스템을 갈아엎는 이른바, '차세대' 시스템을 도입하는 시기라 병원 직원들 모두와 전산실 조직원, 차세대 시스템을 개발한 개발팀까지 모두 예민한 시기였다. 차세대 시스템을 쉽게 설명하자면, 오늘까지 네이트온 쓰던 사람들, 이제 카카오톡으로 갈아탑니다. 모든 정보를 옮기세요! 하는 변화다. 말이 쉽지, 30년 넘게 쓰던 대형병원의 모든 환자, 처방, 간호, 원무, 경영 등등의 데이터를 하루아침에 다른 데이터베이스로 옮기는 것은 아주 무시무시한 작업이거니와 기존 시스템 UI(사용자 인터페이스)에 익숙한 사용자들이 새로운 시스템 UI에 적응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그 기간 내 불편사항도 마구마구 속출하기 때문에 사용자인 병원 임직원들은 예민하고 전산실은 긴장하는 시기다. 그러니 이 작업에는 몇 달이 걸린다. 그 몇 달 동안은 모든 전산 직원이 돌아가며 새벽 시간에 응대 당직 근무를 섰다. 시간표 배정에 잘못 걸리면 아침 8시에 출근해서 그다음 날 아침 7시에 퇴근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히 모든 시스템에 대한 업무를 당직자가 답변할 수 없으니, 문제 상황을 접수한 뒤 적절한 담당자에게 인계하는 업무였다. 


나는 신입이기도 하지만 그나마 담당하던 시스템이 원무과 시스템이라 처방, 간호 시스템. 그러니까 의사나 간호사 선생님들이 쓰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일절 답변이 불가했다. 그리고 새벽 시간에 문의가 들어올 만한 시스템은 처방, 간호 시스템이었다. 그러니 그 문제 상황을 정리하여 담당자에게 전달할 뿐이었는데, 새벽 3시 외과 인턴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박지윤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 외과 OOO인데요, 지금 당장 처방 내려야 하는데 이게 안돼요. 뭐 이렇게 만들어 놨어요?"

"네 선생님 지금 보시는 화면 상단에 화면 번호가 보이실 거예요. 상단의 화면번호를 말씀해주시겠어요?"

"아 안된다니까 내가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냐고 tlqkf!"


반말과 욕설이 있었고 침착함과 예의는 없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 저는 한쪽 눈을 가리고도 어떤 사람이 기침을 했는지 알아차리는 궁예가 아닙니다. 수화기 너머로 당신이 설명하는 정보를 듣고,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를 전달하거나 그것이 불가할 경우 잘 정리하여 알만한 선배에게 전달할 수밖에 없는 1년 차 무지렁이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 네 죄송합니다 선생님. 화면 번호를 말씀해주셔야 문제 상황 파악이 가능합니다..." 


목구멍에서 분노가 부글거려 목소리는 울렁거렸지만 새벽 3시의 졸음이 덮어준 덕분에 비교적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분노하던 그이는 스스로의 분을 못 이겨 전화를 끊어버렸다. 알고 보니 그 의사는 '입원' 탭에서 해야 하는 처방을 '외래' 탭에서 하려고 하니 그이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 날이 밝아 상황을 인계했던 담당자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게 된 나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선배들은 원래 의사 중에는 인턴들이 가장 지랄 맞다고, 그리고 그중에서도 외과 인턴들이 최고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나는 어느 누구도 막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 다짐했다. 가령 G-드래건처럼. 당시 수첩에도 "G드래건이 될 거야! 쥐니 드래건!" 같은 시답잖은 말들을 틈 나는 대로 끄적이고는 했다. 그러나 돌아보니 나는 틀렸다. 어느 누구도 막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어느 누구도 막 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였다. 적어도 그 편이 더 빠르긴 더 빠를 것이다.


사회생활은 좋은 귀감을 만나 닮아가며 배울 기회보다는 반면교사 삼고 닮지 않을 것들을 학습할 공산이 크다. 혹시 위에 글을 읽고 미간을 찌푸렸거나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했던 선생님이라면 이 말을 한 번 소리 내어 따라 해 보시겠어요?


<문의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무언가를 문의하기 전에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이 없을지 한 번만 더 생각해보고 문의하는 것은 불안하고 연약한 영혼 하나를 살리는 일이 될 수 도 있고 더 나아가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인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간편하고도 이타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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