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내 탓하는 거 아니겠지? 호홓~"
나도 이 여자를 이렇게 오래 탓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첫 회사를 퇴사하는 날까지 첫 회사의 부서 배치는 나한테 저주였다. 클 대 大 자를 쓰는 대기업 말 그대로 정말 조직이 크기는 크다. 회사 아래에 사업부 그 아래 여러 개의 팀, 그리고 팀 아래에는 여러 개별 부서가 있다. 신입사원 입문교육은 사업부 단위로 진행하기 때문에 사업부까지는 이미 선택한 상황이었고, 나는 전산운영을 담당하는 ICTO*사업부 아래 [서비스 ICTO팀]이라는 팀을 선택했다. (*지금은 여러 번의 조직 개편으로 인해 쓰지 않는 명칭이지만 ICTO라는 명칭은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ies라는 창조경제 시대의 허울 좋은 말에 외주를 뜻하는 Outsourcing의 O를 덧붙여 만든 명칭이었다. 아웃소싱의 정확한 뜻을 그때 알았더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 팀을 선택한 이후부터는 같이 교육받은 동기들이 뿔뿔이 흩어져 여러 곳에 산재한 각각의 팀 스탭 부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우리 팀에는 나 포함 4명이 지원했다.
한 부서 구성원 규모가 100명이 넘는 부서들도 있어, 전사 인사팀이 아니라 각 팀 단위로 인사발령을 담당하는 팀 스탭 인원들이 있는데, 내가 지원한 팀의 경우 하늘하늘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자 책임님이 신입사원 네 명을 맞이했다. "어 왔네~" 아침부터 세팅을 했을 것 같은 웨이브 진 긴 머리와 조금은 화려한 화장, 백화점 1층에서 나는 향기. 멋모르는 신입사원 눈에는 'IT회사에 일하는 사람'이라고 떠올렸을 때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몇 년 일하고 보니 대기업 스탭부서에서 일하는 여자 책임님들은 대체로 그런 이미지였다. + 백화점 2층 숙녀복 코너에서 파는 옷을 입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니.
내가 그 팀을 선택한 이유는 내가 가고 싶어 했던 1 지망으로 지원했던 광고회사. 제일기획의 전산 부서가 그 팀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비질을 해도 대갓집에서 하랬다고 전산운영을 해도 광고회사에서 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전산 부서의 분위기는 그 고객사를 닮는다는 말이 있어서, 크리에이티브한 광고회사의 분위기를 한껏 닮아있을 것 같아 부푼 마음이었다. 실제로 제일기획이 점심시간에 2시간이기 때문에 전산부서도 2시간이다. 그러나 그 팀에는 에버랜드. 제일모직, 신라호텔 그리고 병원의 전산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팀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지만, 부서는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애당초 팀 내에 어떤 부서의 T.O 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고 그래도 나는 제일기획에 T.O 가 있겠거니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예 없었다. 당시 티오는 병원 2, 제일모직 1, 신라호텔 1이었고 그 정원에 따라 네 명이 이 팀에 오게 되었는데 한 명은 인턴 때부터 제일모직에서 인턴을 했고 또 그이가 원했기 때문에 제일모직으로 확정됐다. 한 명은 본인이 신라호텔을 적극적으로 원했다. (여기는 사실 안 가기를 잘했다.) 제일기획에 티오가 아예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 나는 어디에 가고 싶지도 않아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다가 선택의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목소리가 작았던 인원 둘이 병원으로 배치됐다. 이게 내가 2년 동안 병원에서 일하게 된 이유다.
그리고 돌려 돌려 돌림판도 아니고 뽑기도 아닌 사다리 타기도 아닌 부서 배치 과정을 마치고 난 여자 책임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가는 걸로 하자~! 나중에 나 탓하는 거 아니지? 호홓" 산뜻하고 가뿐했다. 아마 '신입사원 부서 배치'라는 그녀의 일과 중 하나의 태스크에 불과했을 이 과정이 나의 2년과 그 이후 커리어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 것. '부서를 옮기면 되지 않냐?'라는 질문을 많이 듣는데, 이때쯤 설명하게 되는 병원의 특이점이 있다. "병원이 뭘 쓴다더라? 델파이였나...?" 부서 배치를 담당하는 그녀도 그 부서에서 어떤 언어를 쓰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JAVA라는 웹 기반 언어를 쓰는 다른 부서와 달리 델파이, 파스칼 C라고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언어를 쓰는 회사 내 거의 유일한 부서였다. 내가 6개월 간 교육받은 언어 역시 JAVA였는데 이는 6개월 동안 영어를 배웠는데 갑자기 라틴어를 하는 나라에 배치된 셈이었다. 그러니 부서 전배도, 이후의 이직도 쉽지 않은 섬 같은 곳으로 가는 셈이었다. 부서 배치가 확정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서울에서 경기도를 넘어가는 시절이었는데, 서울에서부터 터진 눈물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섬으로 떠나는 기분이었다.
부서에 배치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그룹장은 나와 동기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일주일 해보니까 어때? 이 부서할 만한 것 같아?" 당시의 그룹장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혼자 되뇐다. '알 턱이 있나. 장난하나.' 일의 프로세스 숙지는 고사하고 부서 조직원들도 아직 다 만나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군포에서 일원동으로 출근도 너무 고되었고, 업무 OJT를 받았으나 귀로 듣기는 했지만 머리로 알아듣지는 못했다. 살면서 한 번도 가 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던 3차 병원에서 하는 일을 일주일 안에 파악하고 습득하기란 당연히 무리였다. 그러니 여기에서의 일이 나와 맞을지 안 맞을지 알 턱이 있을까? 이 부서가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라면 사실 이미 나쁜 쪽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바로 지근거리에서 일일이 알려주시고 챙겨주시는 선배들의 심성은 너무 좋은 분들이었기 때문에 "좋은 것 같아요."라고 대답해버렸다.
"부서 바꾸고 싶으면 지금 말해야 돼."라고 그룹장이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신입사원이 부서에 배치된 지 1년 내에 퇴사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면 그룹장에게 페널티가 있고, 부서 배치 후 일주일 내에 변경된다면 페널티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난 분명히 말했다~? 좋다고 했어?" 철저한 면피용 멘트였다. 못을 박아두는 첨언까지 완벽하게 비겁했다.
신입사원은 말 그대로 조직에 새로 들어온 사원. 회사가 일을 하는 곳이라는 것을 미루어 보아 '일'이라는 게이지만을 따져서 판단해 본다면 인간의 생애로 갓 태어난 아기에 가깝다. 물론 다 큰 성인이기는 하지만 신입사원에게 완벽한 판별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니 꼭 사수에게 물어서 일하는 과정이 있으리라. 그러나 꼭 이런 인사제도에 있어서는 신입사원을 별안간 다 큰 성인으로 본다는 점이 아주 비겁하다. 오히려 일주일 안에 부서 배치의 좋고 싫음을 판별하기 어렵고, 이의제기를 할 수 없다는 점을 역이용하여 제도를 만들었다는 생각까지 든다. 조직이 크면 클수록, 견고한 시스템이 되어가고 그런 시스템에 있어서 잡음과 수정사항, 이의제기, 예외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은 에러고 골칫거리니까. 그러니 그런 골칫거리가 발생하지 않는 쪽으로 교묘하게 설계된 부분들이 조직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참담하고 속상하지만 결국 내가 회사생활을 하며 보고 배운 것은 그런 것들이다. 골칫거리가 발생하지 않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가고 내 책임이 되지 않도록 면피하는 방법.
2022년의 신입사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2015년의 신입사원에게는 순응과 인내가 미덕이었고 우리 동기 중에는 일주일 내에 다른 부서로 가겠다는 용감한 신입사원은 없었다.
부서 배치를 했던 팀 스탭 여자 책임, 그룹장. 그들의 하루 일과, 그 하루의 태스크에 불과했을 부서 배치와 면담이었겠지만 나는 선연하고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비겁함을. 그리고 그 제도의 비겁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