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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리카팕 Sep 07. 2022

취뽀가 뭐라고

합격의 기쁨


"회사 다닐 때는 무슨 일 하셨어요?"


요즘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이다. 그럼 나는,

"제가 커리어가 정말 엉망진창인데요… "

또는 “지금 하는 일이랑은 정말 상관없어요.”


지금이야 쿨하게, 심지어는 조금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커리어 패스를 설명할 때마다 조금 곤욕스럽고 (정말이지 개연성 없기가 막장 드라마처럼 엉망진창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치욕스러웠다. (엉망진창인 선택이 바로 내가 한 선택이었기 때문에…)


엉망진창 나의 커리어 서사를 간단히 읊자면 이렇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꿈이 카피라이터였는데요,

이탈리아어과에 갔어요. (띠용)

근데 또 이탈리아어가 재밌던데요?

그래서 교수님이 되려고 했어요.(띠용 2)

담당 교수님이 “누가 죽어야 T.O가 난다”라고 하셔서 취업 준비를 시작했어요.

근데 학교만 다녀서 대외활동이나 공모전에 입상한 적이 없었고 당연히 서류 광탈을 했어요.

그러다 알게 된 게 SSAT(삼성그룹 채용시험)이었어요. 거기는 사진도 안 보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제일기획(삼성그룹 광고회사)에 지원했는데, 합격은 그룹 내에 다른 회사에 했더라고요? (띠용 3)

그게 제 첫 회사인 IT 회사라 2년은 개발자로 일했어요. (띠용 4)

저는 제가 2 지망에 지원한지도 몰랐는데 2 지망에 붙은 거죠. 


그 2 지망이라던 채용 전형은 비이공계 전공자, 문과 전공자들을 뽑아 6개월간 소프트웨어 개발 교육을 시키고, 교육을 수료한 대상들이 입사하게 되는 전형이었다. 같은 그룹사 내에서 2개의 회사를 1,2 지망으로 동시에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 흔한 케이스는 아니었다. 스티브 잡스 같은 융복합형 인재가 대대적인 채용 화두로 떠오르던 시기에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정말 우연히, 내가 지원한지도 모르게 그 전형에 지원을 했고 (채용 지원 시스템에 입력해야 하는 항목이 워낙 많았는데 몇 번이나 날려 먹어서 타성에 젖어 모든 항목들을 입력하다가 2 지망도 그렇게 아무거나 입력하게 됐다.) 문 닫고 취업에 성공한 셈이었다. (이후로는 해당 전형으로 채용하는 인원이 급격히 줄었다.)


같이 광고 회사를 준비하던 스터디 친구들은 오히려 그 회사가 연봉이 높으니 더 잘 된 일 일수도 있다며 전산오류를 의심하는 나를 되려 축하해줬다. 나는 그 축하 멘트에 홀랑 도취되었고 어쩌면 더 큰 행운이자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면접을 준비했다. “내가 스티브 잡스가 될 수도 있잖아?” (fun fact : 스티브 잡스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과는 달리 에리카팕이 되었다는 사실!)


당시에는 정말 작은 회사에 지원해도 서류마저 탈락하는 상황이라 어떤 회사인지 잘 모르지만 대기업에 어떤 관문 하나를 통과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언감생심이었다. 이후 운 좋게 면접에도 합격하게 되어 6개월간의 소프트웨어 교육에 입과 하게 되었다. 교육에 입과 되었다는 것은 사실상 채용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체검사를 거쳐, 입과 환영식을 비롯해 회사에서 마련한 여러 가지 환영 행사를 치렀고, 교육생 신분이지만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사원증과 똑같은 모양의 교육생 확인증을 목에 걸고 다니며 회사원 기분을 만끽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고 만 이틀이 되던 날, 다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옆 반 교육생이 자진 퇴소를 했다는 것. 단정한 커트 머리가 돋보이는 여자 교육생이었는데, 언론인이던 본인의 꿈을 좇겠다는 단호하고 강단 있는 사유였다. 교육에 입과한 지 1주일 이내에 퇴소를 확정 지어야 그간의 교육비를 뱉어내지 않는 규칙이 있었다. 당시에 나처럼 2 지망으로 합격한 교육생들이 꽤 있었고 그이도 1 지망은 광고회사였고 2 지망으로 합격한 형편이었고 소프트웨어 교육을 받아보니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반면, 나는 면접을 준비할 때부터 '카피라이터'라는 꿈은 잊은 지 오래였다. 이미 ‘나는 개발자다.’라는 생각으로 면접에서 원하는 자격요건에 나를 구겨 넣었고 정신마저 구겨진 상태였다. 적응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믿으며 있지도 않은 꿈을 만들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이의 선택이 단호하고 멋지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그이가 섣부른 판단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며 취업 뽀개기를 하고 그 자리에 있는 나 자신에 취해 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 선택을 그이의 선택보다 우월하게 여겼다. 


한 번 취뽀를 하고 난 다음에는 불안하고 지난한 시간 속에 다시 자신을 구겨 넣기 싫어서 선택을 번복하지 않기 십상이다. 그러니 본의 아니게 운명론을 따르게 된다. 이게 내 운명의 자리겠거니 지금의 회사, 지금의 포지션, 지금의 상황을 쓸데없이 겸허히 받아들이게 된다. 많은 재직자들이 회사가 너무 싫어도 쉽사리 관두거나 이직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리라. 다시금 그 지옥 같은 채용시장에 매물이 되기 싫어서.


교육기간 동안 총 15번의 시험을 치르고 그중 3번 이상 과락하면 입사가 취소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나는 첫 시험에서 과락했다. 초중고 12년, 대학 4년을 포함해 중등, 고등교육 기간 내내 경험한 적 없던 '과락'의 경험이었다. 그리고 교육 이튿날 자진 퇴소한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나도 그때 나갈 걸 그랬나. 교육을 수료하고 현업에 배치된 이후에도 자주 그 얼굴이 아른거렸다. 사내에서는 알고리즘 시험이 있었는데, 초급만 8번 만에 합격하고, 그다음 단계는 16번 시험 보고도 붙지 못한 상태로 퇴사했다. 겨우 이틀 본 인연이지만, 나는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던 7년의 시간 동안 자주 그 단호한 커트 머리의 그녀가 떠올랐다.


“그때 나도 퇴소했더라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자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2년 후 교육회사인 자회사로의 이직은 선택보다는 도망, 도피에 가까운 이직이었다. (이 이야기는 23호쯤에 다룰 예정) 그렇게 한 번 더 커리어가 막무가내로 꼬여버린 나는 이상하게 쌓여버린 물 경력 연차 덕분에 이직도, 다른 직무로의 점프도 쉽지 않았다. 최선은 아니지만 괜찮은 차선을 선택했다고, 융통성이 있었다고 무마해왔던 과거는 따지고 보면 월급이 나오는 현실에 안주하고, 원하는 일로의 도전할 용기가 부족했던 결과이기도 했다. 첫 단추가 잘 못 끼워져도 단단히 잘 못 끼워졌다. 거기다 자회사로의 이직은 첫 단추를 잘 못 낀 카디건을 까뒤집어 입은 셈이었다. 다시 말해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커리어는 엉망진창이지만 그간의 내 인생 전부가 엉망진창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 거시적으로 봤을 때는 당시 만난 인연들 중 지금 내 인생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보배 같은 사람들도 정말 많고, 그런 경험들이 내 인생에서 꼭 필요한 이정표들을 지난 것일 수 있다고, 그러한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게 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에 너무 도취되면 두고두고 후회할 자충수를 두게 될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강조해 볼 수 있겠다. 취업 준비 기간 내내 불안했던 고생 끝에 맛보게 된 최종 합격의 달콤함을 만끽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그 달콤함 속에서도 미심쩍은 기운이 씹힌다면 뱉어봐야 한다. 선택의 당사자는 스스로 알 것. 인생은 가끔 내가 느끼는 기분이 전부일 때도 있다. 내가 느끼지 않는 무언가, 더 큰 계시와 큰 뜻이 있을 것이라고 이 찝찝함을 뒤로하는 순간, 후회의 실마리가 생겨난다. 모르면 몰랐지, 혹시라도 느꼈다면 그 느낌을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나는 그 느낌을 느꼈고 모른 체 했다. 어쩌면 합격의 기쁨이 그 느낌을 마취시켰고, 마취가 풀리고 보니 그 통증이 심상치 않았던 통증이었다. 결과적으로 행운이라고 생각했던 만큼 불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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