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프로 그거 싫어."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의 직급과 호칭을 '프로님'으로 통일하고자 해서 어수선하던 어느 때. 나와 같은 부서는 아니지만 같은 고객사를 맡고 있어 늘 같이 일하던 차장님이 그렇게 말했다.
수직적인 조직문화를 철폐하고 수평적인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회사에서 가장 먼저 하는 노력 중 가장 뻔한 시도는 호칭을 통일하는 것. 대외적으로는 그럴싸한 시도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시행 직후 내부 상황은 이러하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는 (Top Down) "OO프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 또는 같은 직급인 사람들끼리를 부를 때는 (Bottom Up) "OO프로님~"
하나의 단어가 되었다 뿐이지, '님'을 붙이느냐 안 붙이느냐, '프로님'을 부르는 억양과 인토네이션에 따라 하대인지 존칭인지 미묘하게 상하관계가 드러난다. 이것도 사실 시행 후 1년 이상 지났을 때 이야기고 '프로'제도 시행 초반에는 윗사람만 아랫사람에게 (Top Down 인 경우에만) "OO프로"라고 일찍이 프로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나, 아랫 직급이 윗 직급에게 "프로님"이라고 하는 경우, 기분 나빠하는 경우가 있었다. 앞에서 소개한 그 차장이 그랬다.
"이 새끼는 나 차장인지 아는데 프로라고 불러."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 <회사 생활 잘하는 후배>가 되려면 "차장님~"이라고 불러야 했고, 행여나 "프로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욕 들어 처먹기 좋은 후배>가 되는 것.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일 때 용기 내어 물었다.
"차장님은 프로라고 하는 게 왜 싫으세요?"
"회사 다니는 재미가 없잖아. 올라가는 맛에 다니는 건데. 안 그래?"
그에게 회사는 등산 같은 것이었다. 올라가는 직급에 따라, 그리고 나를 부르는 사람들의 태도가 곧 그가 서있는 곳을 말해주는 이정표였다. 그러니 걸어도 걸어도 평지 같은 '프로제'가 단조롭고 싫을 수밖에. 실로 차장은 등산을 좋아했다. 나를 본인 부서 겨울 산행 워크숍에 데려간 적도 있었다. 두고두고 생각해도 2019년에 부서 워크숍을 한다고 주말에 따로 놀러 갔던 것도 희한하고, 그 워크숍에 외부 부서 사람이 따라간 것도 웃기지만 그때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때는 내가 고객사 파견 근무자로 일하고 있을 때. 본사 건물에서 근무하지 않으니 우리 부서 회식 공지에서 나를 빠트리고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때 그 상황을 가엽게 여긴 차장은 본인 부서 워크숍에 나를 끼워 데려갔다. 나는 부서 회식을 못 가서 서운한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파견 근무자를 더 챙기지는 못할 망정 회식 공지를 누락하고 "지난 회식 때는 왜 안 왔어?"라고 물어, (조세호처럼) "안 불렀으니까 못 갔죠..."라고 하니 "아~ (머쓱) 근데 너만 안 부른 건 아니야~너무 서운해하지 마." (?) 하는 변명 아닌 변명에 적잖이 서운한 상태라 눈물짓는 마음으로 남의 부서 워크숍에 따라갔더랬다.
차장은 직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자기 아랫사람이라고 생각이 되면 감싸주고 맞서 싸워주는 우직함 같은 것이 있었다. 이런 좋은 점 마저 좋은 건가 나쁜 건가 헛갈리기는 하지만 커다란 고객사를 혼자 운영하며 도와주는 동료나 선배가 없던 나에게는 매우 고마운 부분이었다. 가령, 고객사 담당자들로부터 젊은 여자 대리로 무시 아닌 무시를 당하는 경우, 40대 남성인 차장이 통화 한 번만 해주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해결이 되고도 때마다 뭣 같았지만 뭐 어쩌겠나. 그래도 내가 살고 봐야 하는데. 뭐가 어쩌고 저째도 일단 어려운 상황이 해결되면 그 꼰대 우산 아래에 있다는 안전함이 때때로 감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급 게시가 떴다. 차장이 부장이 됐다. 사실 프로제도를 도입한 지 2년 째라 호칭의 변화는 없는 것이 맞지만, 직접적으로 "나 프로 그거 싫어."라고 한 분이니 애써 축하했다. "축하드려요 부장님!"
진급 이후로 그는 조금 달라졌다. 영업대표로서 본인이 해야 하는 허드렛일도 운영자인 나한테 은근슬쩍 떠넘기더니 고객사의 별의별 요구사항을 다 가져왔다. 고객사에게는 좋은 영업대표가 되고, 실로 본인 할 일은 운영자에게 떠넘기는 꼴이었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영업 매출만 홀랑 가져가는 모양새에 신물이 났다. (매출이 커져봤자 운영자에게 이로운 건 단 하나도 없다.) 일만 개 많아지는 거다.
자율 출퇴근제 덕분에 통상 월의 마지막 날은 남은 근무시간만 채우고 퇴근하면 된다. 고객사가 본사보다 집에서 가까웠던 부장은 집에 일찍 가고 싶은 날이면 상대적으로 출퇴근의 감시에서 자유로운 고객사로 출근하거나 본사에 있다가 중간에 고객사로 넘어오고는 했다. 그날도 부장은 말일이라 일찍 퇴근할 심산으로 오후에 수원으로 넘어왔다. 그런데 굳이 수원까지 와서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시키길래
"이것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라며 본인의 일을 떠넘겼다.
"그럼 부장님이 하시면 되겠네요."
그간 떠넘긴 허드렛일과 이것저것 쌓여왔던 울분에 회사생활 7년 만에 윗사람한테 개겨봤다. 물론 나도 제정신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으른들 말로 눈이 헤까닥 뒤집혀있었고 귀에 '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긴 몰라도 무슨 영양소 하나가 모자랐던 것 같다. 가령 '싸가지'. 랄까.
"아니 이게 뭐 어려워?"
"아니 그니까 어려운 일 아니니까 부장님이 하시라고요~"
"아니 무슨 말이 그래? 싸우자는 거야?"
"아니 싸우자는 게 아니라 저한테 말씀하실 게 아니라 부장님이 하시라고요~ "
해서 부장이 하게 됐다. 정확히 그가 했다고 볼 수는 없기는 하다. 그는 다시 본사에 있는 본인 부서의 아랫사람에게 전화해서 나에게 시키려던 일을 지시했다. 그렇지만 그 일을 내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2017년 드라마이지만 사이다 명언으로 아직까지 회자되는 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의 이유리 대사 중 이런 명대사가 있다.
"역지사지라는 말 알아요? 역으로 지랄을 해줘야 사람들이 지 일인 줄을 안다."
헤까닥 돌았던 눈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바로 쫄보 모드로 돌아온 나는 부장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실수했습니다."라고.
그러나 이날 이후로 잔 심부름 같은 허드렛일 지시는 없었고 꼭 필요한 의사소통만 차가운 메일로 전하고는 했다. 한 번의 지랄은 제법 효용 가치가 있었고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 유효기간이 얼마 정도인지 가늠할 여유 없이 그 일 이후 석 달 뒤 나는 퇴사했다.
꼭 그 부장 때문은 아니었고 여러 가지 문제로 회사에 정이 많이 떨어졌었다. 이만하면 이 회사에서 먹을 욕은 다 먹었다고 생각했고 그런 것에 비해 내가 회사를 대신해서 할 도리는 다 했다 생각했다. 퇴사할 즈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부장도 나만큼 회사에 정나미가 떨어지고 사기가 저하되어 예전과 달랐던 것. 부장과 나는 마치 짜고친 것처럼 한 날 한 시에 퇴사했다.
등산을 하듯 회사를 다니던 사람에게도, 산책을 하듯 회사를 다니는 사람에게도
뭣 같은 회사는 뭣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