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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Apr 06. 2018

'엄친딸' 은조씨의 비애

 은조씨는 어린 시절 동네에서 '엄친딸'로 불렸다. 큰 키에 나름 단정한 외모의 그녀는 초등학교때부터 학급 반장을 도맡았고 중·고등학교때까지 줄곧 이어졌다. 그녀는 학창 시절 내내 다른 사람 앞에 서고 주목받는 것에 익숙했다. 


 조회 시간에는 맨 앞에서 뒤돌아 서서 아이들의 줄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살폈고, 앞에 나가서 교장 선생님에게 학급 대표로 상장도 자주 받았다. 그녀는 '모범생'으로서 아이들과 선생님 사이를 왔다 갔다하는 메신저 역할에도 충실했다. 때로는 친구들이 자신을 피하는 것 같아 외딴섬 같은 외로움도 느꼈지만 으레 자신이 견뎌야할 '왕관'의 무게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왕관'은 오래 쓰고 있기에 무겁고 버거운 것이었다. '모범생'이라는 굴레는 그녀에게 실수하면 안되고 틀려서는 안되는 강박관념을 주입했다. 늘 다른 사람보다 잘 해야한다는 압박감은 그녀를 짓눌렀다.   

 

 은조씨가 처음 비애를 느낀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명문대에 입학한 그녀는 캠퍼스에 정말 많은 금수저 '엄친딸'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대학에는 공부는 기본이고 얼굴도 예쁘고 집안까지 좋은 '엄친딸'들이 수두룩했다. 고등학교때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가세가 기울었지만 그 정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극복하리라 다짐했다. 그녀는 아르바이트를 몇개씩 해가며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렸다.  

 

 속으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지겠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결국 그녀는 넘지 못할 벽같은 것을 느꼈다. ‘흙수저’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 취업을 앞두고 분초를 다투던 시기. 알바를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그녀는 학교 도서관에 자가용을 끌고 가서 공부하던 '엄친딸'과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질 것임을 직감하고 버스 뒷자리에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예상대로 '엄친딸'들은 졸업과 동시에 연봉이 높은 좋은 회사에 취직했고, 대기업 임원인 부모님들의 소개로 좋은 자리에 일찌감치 시집을 갔다.

 

 이후 뒤늦게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은조씨는 상당한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메울 수 없는 차이을 온몸으로 경험한 그는 예쁘고 돈도 많고 능력도 좋은 진짜 '엄친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때로는 알 수 없는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녀를 키운 완벽주의는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 갭을 메우기 위해 늘 남들과 비교해 자신을 압박했고 불안해했다. 자신도 한때 우리 사회의 '비교'라는 잣대에 우월감을 느꼈지만 이번에는 희생양이 된 것이다.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싱글로 혼자 사는 그녀는 이제 결혼을 주제로 한 비교에 시달린다. 때로는 고양이가 유일하게 자신을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봐주는 존재같다.

 

 명절에 모인 친척들은 말은 안해도 하나같이 뭔가 ‘안됐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기 일쑤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해서 결혼을 빨리 할 줄 알았더니만... 네가 뭐가 모자라서 결혼을 못하니‘라는 걱정형이 있는가 하면 ”이번에 우리 딸은 이렇게 대단한 남자랑 결혼했다. 여자는 뭐니머니해도 시집 잘 가는게 제일 아니야?“라는 자랑형도 있다. 은조씨 어머니는 ”요즘 시대에는 굳이 결혼 안해도 되지, 뭐“라며 방어해보지만 어째 다들 표정은 떨떠름하다. 은조씨는 뭔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도 싫고 친척들의 은근한 돌려까기와 비교 의식 속에서 그 자리에서 탈출하고만 싶다. 


 '엄친아', '엄친딸'은 자라서 얼마나 결혼을 잘했고, 얼마나 대단한 배우자를 얻었는지를 비교당하고, 이후에는 그 자식이 얼마나 좋은 대학에 갔는지를 끊임없이 비교당한다. 말 그대로 비교의 악순환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이런 '비교 의식'이 습관화되는 것이다. 사춘기시절 비교당하며 자란 아이들은 나이가 들면서 그 습성을 잘 버리지 못한다. 외모, 돈, 지위, 명예 등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누군가를 무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우월감을 느낀다.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 우위에 섰을 때야 비로소 기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잣대에 의한 만족감은 모래 위의 성처럼 바닷물이 한번 밀려오면 쉽게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라는 책에서 "에고는 비교를 먹고 산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가를 결정한다. 그러나 외부의 대상들 속에서 자신을 찾는 것은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고 말했다. 우월감을 느끼고 그 우월감을 지속하려는 자신만만한 에고의 욕구 뒤에는 열등해지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에고는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만약 누군가 자신보다 더 많이 갖거나 더 많이 알거나 더 많이 할 수 있다면 에고는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상대방에 비해 자신이 '더 적다'는 느낌이 상상 속의 자아 의식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 속의 자아가 쓸데 없이 위축되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보살펴야 한다.

  

 누군가 그 사람 자체로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 속에서 존재를 인식하는 습성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그들은 관심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때로는 비교 속에서 은근이 우월감을 느껴 에고를 충족시키려는 못된 심보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에고는 모든 상황에서 나를 말하고 싶어하는 우리안의 존재이지만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자신을 동일화해야한다. 그것은 지위나 명예, 신앙, 고급 브랜드의 상품, 외모 등이 될수있다. 하지만 에고에 대한 집착은 마음에 기능 장애를 일으켜 분노, 질투, 불행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지금 이순간도 끊임없는 비교를 강요받으면서 살고 있다. 집에서는 다른 집 자식, 아내, 남편, 부모와 비교당하고 회사에서는 다른 직원들과 실적을 비교당한다. 미디어를 통해서는 외모가 뛰어난 사람, 돈이 많은 사람, 더 잘나가는 사람, 더 행복해 보이는 사람과 무의식적으로 비교당한다. 그 속에서 끊임없이 초라한 자기 자신을 보며 열등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치 동네 '엄친딸'이 더 잘난 '엄친딸'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것처럼 비교는 비교를 낳고 진정한 자신을 보기 어렵게 만든다, 최근 몇 년간 국내에서 자존감에 대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것은 이같은 사회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오늘 하루는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그 누군가의 속도와도 비교하지 말고 오롯에 자신만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이것은 패배주의도 아니고 자기 위안도 아닌, 진정한 자기애의 발로다. 그러다보면 비로소 옆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새의 소리도 들릴 것이며 함께 가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생길 것이다.

  

 마음에 쌓인 독소를 푸는 연휴 기간. 한번쯤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힌 자신을 안아주고 상처를 보듬어보자.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동안 잘 살아왔다’고 격려해주면서 말이다. 격려가 어렵다면 ‘그동안 힘들었지?’라며 자문이라도 한번 해보자. 누군가의 비교에서 비롯된 즐거움이 아닌 스스로의 자존감에서 비롯된 행복감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할 수 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말이다. 바로 그 행복과 마음의 평안이 우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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