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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Jun 29. 2018

나쁜 남자 감별소

  "그 남자가 처음에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나봐요. 그때는 그냥 애창곡이겠거니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사인이었는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여자 A는 '나쁜 남자 감별소'의 대기실의 소파에 앉자마자 담담하게 그날의 기억을 풀어냈다. 몇개월이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눈앞에 생생한 듯했다.

  A는 처음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가라오케에서 미팅을 한다는 친구의 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오히려 늦게 와서 마지막에 그의 옆에 앉은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늘 미팅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 옆에 앉을 기회를 놓쳐 대화 한번 못해보고 '타임 아웃'을 당한 적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일단 외모가 제 이상형이기도 했고, 그 사람도 다른 여자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계속 저와 대화를 나눴어요. 말투가 가끔 아니다 싶은 적도 있었지만 적어도 위선적인 눈빛은 아니었죠."

 

 A는 이성에게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자신과 감정의 코드가 맞는 '소울메이트'를 만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김동률, 박효신, 브라운아이드소울, 성시경 등 그녀가 좋아하는 가수의 발라드 노래만 쏙쏙 골라 부르는 그를 보고 A씨는 '드디어' 자신이 그동안 찾아헤매던 느낌이 통하는 남자를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려왔다.


 평소 스마트한 인상의 남자를 좋아하는 A씨는 그의 작은 이야기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고 쉴새 없이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드디어 인연을 만났다는 생각에 계속 입꼬리를 올리고 있어 경련이 날 정도였다.

 

 "그동안의 미팅의 패인이 잘 웃지 않아서라는 지적을 종종 받았기 때문에 무조건 맞장구를 치고 하도 웃었더니 나중엔 머리가 다 아프더라구요. 무엇보다 다른 여자들에게 눈길이 돌아가려는 그의 눈을 잡아두려는 목적이 더 컸죠. 그때 이미 그는 나의 조급함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요."


 A씨는 수많은 미팅에서 계속된 실패를 이번에도 절대로 거듭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남자둘, 여자둘. 넷은 술마시가 게임을 했고 A씨는 옆에 있는 사람과 커플이 됐다. 술취한 듯 그의 스킨십이 그리 싫지 않았다. 결국 A씨와 그 남자가 그 노래방을 나올때는 손을 잡고 있었다.


 "나오면서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저한테 별로 관심 없는데, 자리를 그렇게 앉게 되서 저하고만 이야기를 하신거 아니에요?"라고 슬쩍 떠보는 질문을 던졌더니 그는 'A씨만 계속 보고 있었던거를 진짜 모르겠냐'고 반문하더군요. 그 순간에는 완벽한 진심으로 믿어졌죠."

 

 그는 인근에서 술을 한잔 더 하자고 이야기했고 주변에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어 자신이 잘 아는 이자카야로 가자며 그녀를 택시 안으로 이끌었다. 내린곳은 어두 컴컴한 주택가. 그가 편의점에 맥주를 사러 간다고 했을때만해도 A씨는 편의점 야외에서 맥주를 한잔 하자는 이야기로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발길이 머문 곳은 인근의 모텔 앞이었다.


 "처음엔 그곳이 모텔촌이라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했어요. 무엇보다 거짓말로 모텔로 유인을 했고, 가지 않겠다고 하니 들어가서 영화만 보자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더군요. 차라리 솔직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고 했으면 어땠을까. 너무 황당하고 기분이 나빴죠. 결국 제 생각과는 달리 거짓말로 자신의 욕구만 충족시키려는 이기적인 남자였던거죠."


 그래도 일말의 좋아하는 감정이 남아있던 A씨는 "내일 만나자"고 에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 A씨는 그 다음날 "이번엔 진짜 영화를 보자"는 그의 메시지에 잠시 흔들렸지만 그 장소가 영화관이 아닌 또다시 모텔이라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나를 단지 자신의 욕구 해소용으로 밖에 보지 않은 거잖아요. 모처럼 대화도 통하고 감성적이고 부드러운 남자를 만났다고 좋아했는데 정반대의 사람이었으니 정말 처참했죠."


  "제 경우도 순정남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는 좀 다르더라구요."


 A씨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은 것인지 여자 B도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나이가 들면서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갈구가 있었던 B는 우연히 소개팅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한 남자를 만났다. 인터넷 상으로 이성을 만나는데 약간의 거부감을 갖고 있던 B는 그는 한 친구가 소개팅 앱으로 결혼할 남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보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첫 인상도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처음 만나자 마자 외로움에 처절히 몸부림을 쳐왔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묘한 동질감을 느꼈어요. 그도 나처럼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려왔구나 하는 그런 동질감이요. 나와 비슷한 점도 많았고 이야기도 잘 통해 인연인가 싶었죠."


 남자는 매일 B에게 연락하고 그녀가 어디를 가든지 저녁마다 픽업을 하러 왔다. B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하는 남자에게 이미 마음이 반쯤 넘어간 상태였다. 그녀는 어쩌면 오랫동안 쉬었던 연애 세포를 서둘러 깨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늘 밀당을 하고 간을 보는 남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저돌적인 그의 대쉬에 B는 한동안 들뜬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만난지 며칠 되지 않아 그는 B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고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밤을 보내자는 제안을 여러차례 해왔다. 아직 상대에게 확신이 없던 B가 이런저런 핑계를 이를 거절하자 남자는 그에게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짜증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만난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아 B는 그가 자녀가 있는 이혼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제서야 그녀는 남자가 그토록 자신 없어하고 관계에 집착했던 이유가 짐작이 갔다.
 
 "이혼남에 대한 뚜렷한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나를 속이고 만났다는 것을 안 순간 느껴지는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더군요. 며칠간 느꼈던 사랑의 감정에 빠져 허우적댔던 내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죠."

 

 앞에 조용히 앉아있던 여자 C도 머뭇머뭇하다 입을 열었다. 셋중에 가장 최근에 겪은 일이었다. 30대 중반, 슬슬 결혼이 조급해진 C는 오프라인 동호회 모임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평소 그녀의 이상형도 아니었고 키도 그녀보다 작은 편이었지만, 세심한 마음 씀씀이에 그녀도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법 공부를 하고 국가 고시를 패스한 그는 이사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던 C에게 크고 도움을 줬고 둘의 사이는 가까워졌다. 작은 믿음은 쌓여 사랑으로 발전하게 됐다.


 연인이 된 두 사람. 남자는 C에게 결혼을 해서 해외 연수를 함께 떠나자는 달콤한 제안을 했고 그녀도 만난지 두달만에 결혼을 결심했다. 그녀는 드디어 인연을 만나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는 기쁨에 주변에 결혼 소식을 알리기 시작했다.


 "결혼 소식을 알리면서 한 지인을 만나게 됐는데 제 이야기를 죽 듣더니 뜬금없이 유부남이 의심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더니 얼굴색이 노랗게 변하더군요. 결국 주변을 수소문해서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됐죠.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어떻게 할거냐며 울부짖자 그는 이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변명과 함께 어떤 보상을 원하느냐고 당당하게 묻더군요."


 C는 아직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듯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로 먼 곳을 응시했다. 대기실의 세명의 여성들은 아무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전이되는 듯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배신감, 인간에 대한 배신감이라는 공통된 상처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감별소에 "따르릉~~~" 소리가 울리더니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소장 비서는 "네, 소장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구요? 네. 알겠습니다"라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소장님이 운전하고 오시다가 접촉 사고가 나셔서 지금 처리중이시래요. 아무래도 오늘 상담을 못 하시겠다고 전해달라고 하시네요. 죄송합니다."


 세명의 여성들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처음에 감별소에 들어왔을 때 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다. 아마 꽁꽁 숨겨왔던 자신의 상처를 내놓고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일부나마 스스로 치유를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들은 물론 세상에는 '나쁜 남자' 못지 않게 '나쁜 여자'들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남성 혐오나 남녀 편가르기의 문제라기 보다는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는 잘못된 인성의 문제에 가깝다. 남녀 사이에는 성적인 문제가 얽혀있기 때문에 더욱 미묘하고 복잡하다. 상대에 대한 예의와 존경이 없다면 서로에게 더욱 상처를 쉽게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다.


 주변을 돌아보면 '나쁜 남자'에게 유독 잘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에 달콤한 말과 행동에 이끌렸지만 나중에 잦은 거짓말로 배신감과 상처를 안겨줘도 이를 쉽게 끊기가 어려워진다. 이는 자신에 대한, 또는 상대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다.

 

 정신분석학자인 로날드 페어베언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쾌락을 줄 수 있는 타자들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양육자와 경험했던 사랑의 상호 작용을 다른 사람 관계 속에서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꾸만 '나쁜 남자'에 빠지고 상처받기를 반복한다면 자신의 마음 상태를 먼저 돌아보고 보듬어 볼 일이다. 애정에 대한 결핍, 사랑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작용한 것은 아닐지 점검해봐야한다. 단 그 어떤 순간에도 자기 자신의 소중함이라는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대체 저 세 남자 중에 누가 '나쁜 남자'냐고? 떤 누구도 당사자만큼 둘의 관계를 잘 아는 사람은 없고 상대방을 가장 잘 아는 것도 본인이다. 관계를 정리해야 할지 말지는 해답은 대부분 본인이 갖고 있다. 다만 둘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시간과 정해진 결과를 행동으로 옮기는 의지력이 부족했을 뿐이다. '나쁜 남자' 감별소는 생각을 정리하고 행동에 도움을 주는 곳이다. 아마도 여자 A, B, C가 감별소 문턱을 나서면서 이미 마음에 정한 해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무려 양다리도 아니고 5명의 여자에게 다리를 걸친 남자에게 상처를 받은 여자 D가 심란한 얼굴로 감별소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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