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뭐래도 뉴욕은 여성들의 도시다. 뉴욕에서 다만 얼마 동안이라도 살아보기로 결심한 건 꼭 수많은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회색 감옥같은 일상을 벗어나 한번쯤 뉴요커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건 남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삶에서 고군분투했던 나에 대한 나름대로 '통 큰' 선물이었다.
뉴욕행을 결심하자 주변에서 여러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뉴욕에 다녀온 내 친구가 그러는데 (길거리가) 더러워서 다신 안간다고 하더라" "집 나가면 고생이야" "뉴욕은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워" 하지만 그 어떤 말들도 나의 뉴욕행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내가 직접 겪지 않는 한 그것은 나의 경험일 수는 없을테니까.
어스름한 땅거미가 지던 저녁, 맨해튼 시내로 들어가면서 마치 놀이 동산에 입성하듯 빤짝빤짝한 도심으로 빨려들어가던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마천루 한가운데로 들어가보니 그동안 TV에서만 보던 타임스퀘어 주변이 번쩍 번쩍 했다. 한밤중에도 아스팔트 바닥이 환하게 보이는 뉴욕의 첫인상은 잠들지 않는 도시였다.
대학때 잠시 들렸던 뉴욕. 학생 때 본 뉴욕과 직장인이 되서 본 뉴욕은 모든 것이 달랐다. 이번에는 도시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눈길이 갔다.
직접 살아본 뉴욕은 다양함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다양한 피부색의 인종들이 어울리고 이야기해도 어색하지 않은 곳. 독특한 옷을 입고 새로운 메이크업을 시도해도 전혀 창피하지 않은 곳.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한 공간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뉴욕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통상 뉴요커들은 새침하고 불친절하다는 선입견이 있었지만, 현지에서 만난 뉴요커들을 일부 완고한 노인을 빼고는 친절했다. 한동안 맨해튼의 거미같은 지하철 시스템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uptown?'과 'downtown?'을 물었지만 인상 쓰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이미 경고를 들은대로 뉴욕의 길거리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분리 수거 없이 길거리에 쓰레기를 모아놓기 때문인 것 같았다. 늘 공사중인 빌딩을 걸어다니다보면 숨이 막힐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뉴욕의 지하철 입구를 나설때면 마치 이상한 나라의 토끼굴을 빠져나온 앨리스처럼 매번 새로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세상의 모든 미술품이 모여있는 것 같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신비한 공연의 세계로 이끄는 브로드웨이 42번가, 자유의 여신상을 볼 수 있는 로어 맨해튼, 그리고 누구나 피사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브루클린 브릿지...
그래서인지 뉴욕에는 혼자 온 여성들이 많았다. 어느날 밤 타임스퀘어 한복판에서 만난 일본인 나오가 그랬다. 그녀는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져 집에 갈 길이 만무해진 난감한 순간에 만났다. 보조 배터리를 빌리기 위해 용기를 내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그녀는 일본에서 캐릭터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일본어라고는 '귀엽다, 최고, 괜찮아요'가 전부였지만, 역시 누군가와 친구가 되는데는 말보다는 성격이 우선이다.
우중충하던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고개를 들었던 어느 날, 우리는 맨해튼에서 페리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을 함께 봤다. 스테이튼 아일랜드에서 바라보는 맨해튼은 한없이 아름다웠다. 때로는 나를 잘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다니는 일은 즐겁다. 그 순간은 나의 과거, 미래의 고민을 잠시 잊고 현재의 나와 오롯이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는 뉴욕에서 일하고 있는 배우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뉴욕은 마치 '무인도'와 같다고 했다. 각 나라의 최고들이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오지만, 많은 사람들이 실패한 뒤 상처 받아 뉴욕을 떠나고 누군가 또 새로 오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곧 떠나갈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수 없다고. 그래서 뉴욕은 외로움에 사무치는 '마음의 무인도'와도 같은 도시라고.
그러고 보니 뉴요커들이 또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에서 홀로 외로이 대낮에 낮술을 마시는 사람,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지만 뉴욕 최고의 백화점 삭스 피브스 애비뉴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여성. 높은 하이힐을 신고 뮤지컬 '시카고'의 복장을 하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 때마침 뉴욕 지하철에 붙어있는 "우리는 모두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는 드라마 포스터 문구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뉴요커들도 삶의 고된 현장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외로워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속에서 이 세상 누구도 자신에게 던져진 삶의 무게를 피할 수 없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자세로 극복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귀국하자마자 주변 사람들 하나같이 "그래서 운명적인 로맨스는 없었어?"라고 묻겠지. "한국에서 없던 재주가 외국 간다고 생기겠어?"라고 호기롭게 응수하겠다고 다짐해보지만 속으로는 "휴. 난 어째 외국에서도 안 통하나봐."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I Feel Pretty"라는 영화가 나왔다. 마침 떠나온 뉴욕이 배경이길래 눈길이 갔고 점차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외모도 평범하고 매사에 자신 없고 위축된 여주인공이 점차 자신감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의심하게 돼요. 누군가에게 하는 못된 말을 듣고 자라죠. 그리고 계속 우리 스스로를 의심해요. 모든 자신감을 잃을 때까지 말이죠. 가지고 있던 자존감, 믿음까지 없어져요. 그런 것들이 자신감을 갉아먹게 두지 않았다면요? 우리가 강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가 외모를 신경쓰지 않았다면요? 목소리도요. 어렸을 때의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면요? 누군가가 우리에게 부족하다고 말하고 날씬하거나 예쁘지 않다고 해도 우리가 현명하게 우린 더 나은 사람이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요? 왜냐하면 저는 저니까요. 이게 나에요. 나로 사는게 자랑스러워요. 우린 멋진 여자들이에요. 정말 멋진 존재죠."
그래. 미국에서 만난 각기 개성 있는 사람들. 나 역시 수많은 세계인 중 하나였다. 또한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고 단 하나의 삶의 공식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다. 남들 보기에는 모자르고 부족할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 뿐인 내 삶의 주인공이니까. 적어도 내 삶의 무대에서는 주인공으로서 다른 사람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뉴욕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자신감을 선물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