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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Nov 14. 2018

지금, 당신과 그 사람의 거리는 몇 cm인가요?

  수연씨는 겉으로는 도도해보이지만 사람에게 위로를 받고 또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는, 관계 지향형 인물이다.


  누군가는 나이를 먹었는데 어찌 그리 순진할 수도 있냐고 되묻겠지만, 그녀는 사람을 쉽게 믿고 자신에게 맞다 싶으면 앞뒤 안재고 마음의 문을 금방 여는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였다. 그렇게 아는 사람에게 여러번 '뒤통수'를 맞았음에도 어느새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과거는 금세 잊었다. 사람과 세상에 관심이 많은 것은 어찌보면 그녀의 천성이었다.


 어릴적부터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자신과 뜻이 맞다 싶으면 적극적이고 솔직하게 다가갔다. 자신이 먼저 솔직하게 고민들을 털어놓고, 다른 사람의 고민을 공감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잘 이끌어내는 화법 때문에 주변에 지인들도 적지 않게 많았다. 그녀와 반대되는 다소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의 친구들도 있었고,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은 더욱 빨리 가까워졌다.


 직업이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이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든 처음 본 사람과도 스스럼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그녀의 성격은 때로는 일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덕분에 그녀는 업계의 '마당발'로 통했고, 여러 모임을 만들어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수연씨는 나이가 한살씩 먹어가면서 자신의 이런 성격이 되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건들을 목도하게 됐다. 꼭 자신이 마음을 연만큼 다른 사람이 그만큼 반응하지 않는데서 오는 실망감은 아니다. 수연씨도 그렇게 속이 좁은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먼저 속내를 털어놓았던 것이 오히려 그녀에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 오는 충격적인 순간, 그녀의 즐거움이 었던 인간 관계 맺기는 두려움을 넘어 공포로 다가왔다. 자기가 믿었던 누군가가 자신을 겨냥하는 것은 '배신'이라는 두단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극도의 무력감과 우을증을 동반했다.


 본래 격식을 따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수연씨는 어느 정도 친해지면 쉽게 '언니, 동생'이나 '오빠, 동생'으로 말을 놓으면서 벽을 없애고 가까워지는 것을 좋아했지만 사람들은 벽을 없애고 편하게 다가갈수록 사람들은 그녀에게 함부로 굴기 시작했다.

 

 아무리 '금사빠'라지만 나름대로 눈치와 직관이 있는 편이라고 믿었던 수연씨. 자기 편이라고 믿었던 사람에게 몇차례 아픈 배신을 당하고 나서야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눈앞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맺었던 관계들이 필름처럼 지나가기 시작했다. 힘들고 외로울 때 흔들리는 그녀를 붙잡아준 선물처럼 고마운 관계도 있었지만, 그녀에게 결국 상처로 남은 관계도 있었다.

 

 특히 몸이 힘들어 병원에 있거나, 마음이 어려워 길거리를 방황할 때 의지했던 사람들에게 모진 말을 듣거나 관계가 악화될 때의 충격은 한층 배가됐다. 마음의 면역력이 없는 상태에서 무방비로 한대 엊어맞은 느낌이었다.


 "대체 어디서 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간 죄 밖에 없는데, 왜 그들은 나에게 상처를 주는 끔찍한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제서야 수연씨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상당한 훈련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조건 친절하게 한다고, 잘해준다고 진정성 있는 인간 관계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간 관계는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기에. 급히 먹은 떡이 체한다고 오히려 급하게 친해진 관계는 그만큼 쉽게 틀어진 경우도 많았다.


 처음에는 누구나 자신의 단점은 속이고, 좋은 모습으로 포장한다. 연애를 할때, 처음 누군가를 만날 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좋은 모습만을 보이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누군가의 단점을 애써 찾으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거리를 서서히 좁혀가면서 이 사람이 나랑 맞는 사람인지, 평생을 함께 가도 되는 상대인지, 나의 삶 전반에 좋은 영향을 주는 상대인지 조심스럽게 살펴봐야한다.

  물론 사람 사이에는 어떤 피치 못할 사건으로 그런 시간을 단축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우리는 그것을 때로는 '운명' 또는 인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인연인지, 악연인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안다. 그래서 사람 사이가 좋건 나쁘건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건 사람을 간보이기 위한 '밀당'과는 색깔이 다르다. 철저히 나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자 자기 안전망인 셈이다.


 그러고나서 보니 수연씨는 성급함으로 인해 인간 관계를 망친 과거의 사례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연애를 할 때는 너무 상대가 마음에 들어 관계의 진전을 급하게 이루고자 만난지 되지 않아 바로 '오빠', '자기'라고 부르자 마자 상대가 자신을 함부로 대했던 기억. 소개팅에서 만난 그 남자는 처음 만난 날 '오빠'라고 호칭을 하자마자 바로 진한 스킨십을 했고, 그토록 로맨틱하던 오빠는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성관계 요구에 응하지 않자 바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장에서도 언니처럼 믿고 따랐던 상사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가 개인적인 소문이 온통 회사에 나돌아다닌 기억, 또한 친구 관계에서는 친해졌다는 이유로 무리한 요구를 아무렇지도 하거나 그것을 들어주지 않자 관계를 끊어버린 기억, 조언이라는 미명하에 상처주는 말을 쉽게 하는 경우. 한가지 사실은 그 사람들은 모두 처음에 수연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물론 수연씨도 상대에게 잘못 한 점이 있을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녀가 관계에 조급함이 없이 좀더 신경을 쓰고 다가가 갔다면, 적어도 자신이 상처를 받는 시행착오는 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제서야 수연씨는 인간 관계에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처음보고, 몇마디를 나눠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것도 자신의 교만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아무리 작은 관계라도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오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신중해져야한다.


 특히 모든 인간 관계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나서는 다시 관계를 되돌릴 수도 없는 경우가 많다. 가족 관계나 어린 시절 맺어진 관계가 그런 경우가 많다. 때론 "이 사람은 나를 왜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걸까?"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렇다면 거리가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이유도 없이 집에서 구박을 당하던 딸이 집을 나가고 부모님과 거리를 둔 뒤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사람은 편하다는 미명하에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는 이기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때문에 내쪽에서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수연씨는 어느날 서점의 책 사이를 거닐다가 다가 우연히 정신분석 전문의인 작가 김혜남이 쓴 '당신과 나 사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 책의 뒷표지에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cm로 표시해놨다.


<가족과 나 사이의 거리 20cm>
  사랑하고, 위로하고, 보호하는 등의 행위가 일어나는 거리. 낯선 사람이 불쑥 이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면 긴장을 느끼고, 불안해진다. 그리고 인간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하는 의존 욕구와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하는 독립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른 이 두가지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려면 반드시 거리가 필요하다. 아무리 부모나 사랑하는 연인일지다로 나를 함부로 하게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친구와 나 사이의 거리 46cm>
손을 뻗으면 상대방의 손발을 잡을 수 있는 거리. 신체 접촉보다는 주로 대화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며 적당한 친밀감과 함께 어느 정도의 격식 또한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절대 친구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무엇보다 친구의 비밀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회사 사람과 나 사이의 거리 1.2m>
사무적이고 공식적인 활동이 일어나는 거리. 사적인 질문이나 스킨십이 허용되지 않는 관계이기 때문에 대화에서도 격식과 예의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이 거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개인의 사생활을 알려고 하지 마라. 그렇다고 일부러 적을 만들지도 말라. 싫은 사람과 일을 함께해야 할 때라도 사람과 일을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글귀를 읽고 수연씨는 문득 그동안 사람 사이의 거리를 무시한 채 무조건 '직진'만 했던 자신의 미성숙한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보면 수연씨는 '만남'의 달콤함만을 생각한 채, 성급하게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기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어떤 만남은 그 일생을 좌우할 정도로 중요하다. 우리는 때론 그런 좋은 만남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만남을 더욱 소중히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물건을 담듯이 '사람 욕심'을 부리기 보다는 사람들과의 진정한 관계를 신중하게 맺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들 인간 관계를 난로에 비유한다. 불기에 너무 가까우면 불에 타고, 난로에서 멀어지면 너무 추워진다. 때문에 좋은 관계일 수록 따뜻한 거리를 유지하고, 너무 가까워져 자신이 화상을 입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깝다고 나의 의견이 무시되고, 내가 사라진 종속적인 관계는 건강하지 않다. 가장 경계해야 할 관계다.


 지금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이 평생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내 곁에 있는 사람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평생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친해지는 것 못지 않게 그 관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가꿔나가는 가가 중요하다. 반대로 나에게 상처만 주는 사이라면 둘 사이의 거리를 다시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누구도 아닌 당신 자신을 위해서.

 

 수연씨도 어느 화창한 날 오후, 여느때처럼 예의 약속을 잡지 않고 혼자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을 하나둘 떠올리기 시작했다. 나의 온기가 더 필요한 사람, 나의 온기를 앗아간 사람... 수많은 이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정리했다.  


 지금 사람때문에 마음이 힘들거나 어렵다면, 하던 생각과 일을 멈추고 잠잠히 돌아보라. 당신과 그 사람 사이의 거리는 몇 cm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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