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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Dec 11. 2018

그 누구의 딸도 아닌, 은영

 최정숙씨는 아침부터 신경이 잔뜩 곤두 서 있었다. 오늘은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가 집에 오는 날이다. 정숙씨는 아침부터 집안 청소와 음식 준비를 혼자 다 해낼 생각을 하니 입술이 바짝 탔다. 요즘 70대는 예전과는 다르다지만, 정숙씨는 아들네 가족이 다녀갔다 가는 날이면 밤새 끙끙거리며 몸살을 앓았다.


 딸 은영씨가 그런 엄마가 안쓰러워 외식을 하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자고 하면, 정숙씨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왜 애먼데 돈을 써. 그리고 애들 밖에 음식 먹여서 좋을 게 뭐가 있니. 밖에서 먹으면 애들 챙기느라 불편해서 다들 밥도 제대로 먹지도 못할거고. 그냥 나 하나 고생하고 마는게 낫지."


 은영씨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할 정도로 무서웠던 엄마가 올케에게 '호랑이 시어머니'가 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들 사랑이 유달리 끔찍했던 모친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정숙씨는 딸에게 가끔 며느리의가 못마땅하다고 하소연하곤 했지만, 며느리 앞에서는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괜히 니 동생한테 스트레스 주면 어떡하니. 나중에 산다 안산다하는 이야기 나오면 나만 골치아파." 정숙씨는 아들이 혹시나 자신때문에 아내에게 바가지를 긁힐 것을 미리 염려했던 것이다. 은영씨는 그런 엄마를 보면서 모성애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새삼 느꼈다.


 사건은 동생네 부부가 오기로 한 토요일 아침에 벌어졌다. 은영은 엄마와 아침밥을 먹다가 얼마전 마루에 놓여있던, 박스에 대해 물었다. 며칠간 찾아 해매던 겨울용 코트가 들어있던 박스였다. 회사일로 바쁘던 은영씨는 사라진 그 박스에 대해 물었다.

 
 "엄마, 며칠전에 계단에 있던 내 옷박스 어디에 있어?
 "아. 그거? 버렸어."
 "그걸 왜버려. 내가 초겨울에 자주 입던 코트랑 아끼는 원피스인데. 버리려면 나한테 미리 물어봤어야지."
 "아니 얘가 아침부터 왜 큰소리를 내고 그래?"
 "옷을 사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아. 대체 어렵게 돈 모아서 산 옷을 왜 묻지도 않고 버리는데. 그 옷 어디있어. 밖에 헌옷 수거함에 있어? 내가 가서 찾아올게."
 "벌써 수거해 가고 없지. 아니, 근데 얘가 왜이래. 그리고 꼭 중요한 일 있을때만 이러더라. 조용히 하지 못해?"

 

 핏대를 높이던 은영씨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나아가서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일방적인 엄마의 행동이 황당했다. 게다가 '중요한 일'인 동생네의 방문을 앞두고 자신이 아끼던 물건을 버리고, 되려 자신에게 신경질을 내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은영씨는 한동안 엄마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애써 억누르고 있었던 엄마에 대한 씁쓸한 감정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육남매중 넷째이자 세자매중 둘째인 정숙씨는 밝고 쾌활한 성격의 말괄량이였다. 머리도 좋고, 둘째 특유의 눈치와 싹싹함, 부지런함을 장착한 정숙씨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뒤 그녀의 우군은 사라졌고,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한 7남매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한국 전쟁 이후 먹을거리가 풍부하지 않던 시절. 정숙씨의 엄마는 딸들 보다는 언제나 오빠와 두명의 남동생이 먼저였다. 그 시절의 남아 선호 사상이란 상상 이상이었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사회적 금기이자, 무언의 철칙같은 것이었다.

 

  여성이 대학에 가는 것이 흔하지 않던 시절, 그래도 정숙씨의 어머니는 딸들의 대학 진학을 만류하지는 않았다. 딸 셋은 서울의 대학에 진학했고, 재수생이 된 두명의 남동생도 서울의 재수학원을 다니기 위해 상경했다.


 세자매 중에서도 큰 언니는 공부를 잘한다고 손에 물한방울 묻히지 않고 대접을 받았고, 세상 물정 모르고 놀러다니는 막내는 막내라서 모든 것이 용인됐다. 육남매 중 중간에 낀 정숙씨는 늘 언니와 동생들 사이에서 눈치를 보기 일쑤였다. 결국 정숙씨는 대학 학비를 벌고 두 남동생과 여동생 식사와 빨래 등 건사를 하면서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했다. 정숙씨는 딸 은영씨에게 가끔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동생들을 도맡아 업어키웠어도 지금껏 고맙다는 소리 한번 못들었어. 철이 없어서 그런건가."

 

 은영씨는 가끔씩 엄마가 해탈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내가 소띠라서 일복이 많은가봐"라고 말할 때마다 같은 여성으로서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혼자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지만, 오히려 육남매 중에 나이든 노모를 걱정하는 것은 언제나 고생을 가장 많이 했던 정숙씨였다. 정숙씨가 수술할 때 유일하게 곁을 지켰던 사람이 은영씨였던 것처럼. 


 은영씨가 엄마의 과거 이야기를 들은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그제서야 왜 엄마가 시대 착오적인 남아 선호 사상에 강하게 젖어잇는지를 어렴풋하게 나마 짐작이 됐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어린 시절 겪은 상처를 쉽게 아물게 하지는 못했다.

 

 은영씨는 어릴적부터 공부에 소질을 보였다. 어린 시절 남동생과는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급격하게 사이가 멀어졌고, 초등학교때까지 모범생이었던 동생은 갑자기 이른바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성적이 급속하게 떨어졌다. 그때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사모님'으로 곱게 지내던 엄마도 부업을 시작했다. 동생은 친구들과 엄마가 없는 빈집으로 몰려가 '19금' 비디오를 보러다니면서 공부를 등한시했다.

 

 하지만 불같은 성격이었던 엄마는 동생을 모질게 혼내지 못했다. 은영씨가 성적이 떨어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때는 욕설도 하고 옷걸이로 때리기 일쑤였지만, 희안한게 남동생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훈계를 하지 못했다. 10대의 어린 정숙씨는 어림짐작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동생을 너무나 끔찍히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의 매 한대 조차 들 수 없었다는 것을. 

 

 엄마는 고등학교때 머리가 굵어진 동생을 더이상 혼내지 않았다. '엇나갈까 무섭다'는 것이 이유였다. 엄마는 되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자신이 부업을 했기때문에 아들이 잘못됐다며 미안함과 자책감에 시달렸다. 알뜰살뜰 모아뒀던 돈으로 분양받은 아파트를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고스란히 날리던 날, 정숙씨의 허탈감은 점점 더 심해졌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럴수록 은영씨에게 신경질을 내는 일이 잦아졌다. 30대의 정숙씨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고, 그녀도 어딘가 스트레스를 풀 곳이 필요했다. 어느날 외갓집에 위해 엄마를 따라 나선 은영씨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편애'라는 말을 꺼내자 정숙씨는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불같이 화를 냈다. 이후로 은영씨는 그 단어는 영원히그 단어를 입밖에 내지 않았다.


 10대의 어린 은영씨는 그런 엄마를 보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이 세상에는 나 혼자밖에 없어. 나는 부모가 후원을 못하니, 나의 후원자는 내 자신이 되어야 해. 스스로 성공해야 해."

 

 은영은 공부에 더 악착같이 매달렸고 내신 2등급을 받았다. 하지만 고3내내 긴장에 신경 쇠약에 시달려 수학능력시험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서울시내 대학에 과수석으로 입학했지만, 그녀는 이듬해 재수를 감행해 명문대에 진학했다. 그때도 엄마는 크게 기뻐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냥 장학금 주는 대학 다니면 돈도 굳고 좀 좋아? 여자가 굳이 뭐하러 좋은 대학을 가. 한살이라도 나이 어릴때 빨리 졸업하고, 좋은 데 시집가면 될 것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숙씨는 몸도 약한 은영씨가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숙씨는 취업 준비를 하는 은영씨에게 "니 까짓게 뭘 하겠다고"라는 말을 하곤 했다. 욕심 부리지 말고 적당한데 취직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나이가 먹을 수록 불리해지는 취업 상황과 엄마의 눈치, 초조함이라는 세가지 장애물을 뛰어 넘느라 허덕였다. '돈 한푼 들지 않는' 칭찬이나 격려가 절실했던 때였다.

 

 은영씨가 엄마의 2030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30대가 되고 나서였다. 똑똑한 여대생이었던 엄마도 아나운서, 학교 선생같은 꿈이 있었지만 이를 뒤로하고 대학교 캠퍼스 커플이었던 아빠의 적극적인 구애로 대학 졸업 후에 바로 결혼했다. 대학가의 낭만을 떠나온지 불과 2년, 호랑이 시어머니 밑에서의 시집살이는 '극한직업' 그 자체였다. 게다가 맏며느리로서 첫딸을 낳은 정숙씨는 시어머니의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아들은 그녀가 더이상 아이를 낳고 눈치 보는 시집살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증서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그녀에게 아들은 너무나 고마운 존재였고, 애지중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명절때도 남편 눈치를 보면서 친정에 가서 엄마 얼굴을 한번 제대로 볼까말까하고 그것도 잠시에 만족해야하는 자신을 볼때 '딸은 시집가면 그만'이라는 것은 자신의 삶이 증명하는 불변의 명제였다. 정숙씨의 친구들도 다들 꿈을 접고 시집을 갔기 때문에,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해도 자신의 딸도 그런 프레임에 갇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여자의 일생은 좋은 남편을 만나고, 아들에게 노후를 맡겨야한다는 사회적 통념을 아무런 편견없이 받아들였고 딸에게도 일말의 의심없이 그런 공식을 적용했던 것이다.


 

  은영씨는 대학생이 되면서 혼자 용돈을 벌어가며 나름대로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며 살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늘 불안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성공에 대한 집착이 심했고 불안 장애가 심해지면서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의사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를 물었고, 그때마다 은영씨는 엄마를 꼽았다. 그녀에게 엄마는 '굳이' 자신의 불행을 바라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딱히 자신에게 큰 관심없는 무관심한 존재였다.


 은영씨는 나이가 몇살인데 지금껏 부모탓을 하느냐는 질타를 받은 적도 있지만, 성인의 불안이 대부분 어린 시절 엄마와의 유착 관계로 인해 발생한다는 책을 읽고 자신의 불안의 근원을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기에게는 높거나 낮은 강도의 애정을 일정하게 주는 것이 중요한데, 그 애정 강도가 들쑥날쑥할 때 불안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런저런 이유에서인지 은영씨는 지금까지 제대로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집에서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기적이고 술만 먹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와 그런 남편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는 엄마를 보면 그녀는 자상한 남편, 행복한 결혼 생활이 머리 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결혼해서 늘 힘든 삶을 살아온 엄마의 삶을 볼때마다 '난 엄머처럼 살지 않을거야'라는 드라마 대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때문에 은영씨는 이성을 만나면 지나치게 신중했다. 때로는 의심이나 경계심도 들었다. "아빠도 대학때는 매우 돈도 잘쓰고 낭만적인 사람이었다는데 결혼하고 저렇게 변한 것을 보면 이 남자도 결혼 후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은영씨는 내색은 안했지만 남자를 사귈 때도 이 사람이 결혼 후에 지금 쓴 가면을 벗으면 과연 어떻게 변할 사람인가를 상상하곤 했다. 그래서 관계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고 진지한 관계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학창 시절 '문제아'였지만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남동생은 올케를 만나 자식들을 낳고 가정을 꾸렸지만, 엄마의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들어있던 은영씨는 아직 결혼하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은영씨는 아직도 엄마가 자신을 다른집 딸들과 비교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지만 여전히 관계에 불안과 자신감 부족으로 홀로 독립하는데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은영씨는 드디어 내년에 부모님과 분가를 하고 독립을 하겠다는 결심을 세웠다. 언젠가 시집에 갈 것을 염두해두고 방 한번 제대로 꾸미거나 자기가 원하는 환경에서 살아본 적이 없던 그녀였다. 여전히 나가서 홀로 산다는 것이 불안하고 두렵지만, 더이상 부모님 밑에서 정신적 종속을 이루며 사는 것은 그녀에게 도움이 될 같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감이 부족하고 걱정이 앞서 우물쭈물하고 미루던 버릇을 버리고 이번만큼은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위해서 과감하게 도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생각해보니 은영씨는 늘 '실패하면 어떡하지?', '안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감에 시달리느라 뭔가를 오롯이 자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었다. 뭔가를 결심해도 부모님의 눈치를 보거나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좌절되기 일쑤였다.


 은영씨는 늦었지만 스스로 날개를 펴고 나는 법을 익히기로 했다. 더이상 엄마에 대한 원망은 없다. 정숙씨 역시 어떻게 보면 시대의 희생양일 수도 있으니까. 은영씨뿐만 아니라 적지 많은 딸들이 가부장제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엄마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감정의 하수구'가 되어야했으니까. 그래도 남보다 나은 가족이니까 어렵지만 엄마가 살아온 삶 자체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이제 은영씨는 자기 자신의 삶, 홀로서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혹시 나는 법이 익숙지 않아 시간이 더디 걸리고, 혹시 실패하고 주저 앉더라도 실패마저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용기가 생겼다. 뒤늦었지만 그녀는 모든 상처와 불안감, 열패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속도로 비행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누구의 딸도 아닌, 은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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