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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자 Aug 25. 2019

여자의 적은 여자라구요?


 "제가 다른 건 밀려도 확실히 나이가 어리다는 장점은 있죠."
 
 재연은 2대 2 미팅 자리에서 A의 첫마디를 듣자마자 뜨악했다. 그래도 지난 몇년간 동거동락하면서 '믿거라'하는 동생 중 하나였는데, 처음부터 자신을 디스하는 멘트로 뒤통수를 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혹시 잘못 들었나. 본인도 생각없이 이야기했겠지.'


 재연씨는 그 순간까지도 순수했는지도 모른다. '언니를 힘껏 밀어주겠다'는 A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자기 보다 한참 나이 어린 여자와 미팅에 나간 것부터 순수함의 증거랄까.


 하지만 그때부터 A는 재연에게 쉴새없이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어떨때는 스트레이트로, 잽으로. 레프트, 라이트 훅도 들어왔다. 그녀를 견제하고 묘하게 깍아내리고, 자신을 치켜세우는 듯한 멘트는 줄곧 이어졌다.

 

 고상하게 앉아있던 재연씨는 점차 표정관리가 어려웠고 얼굴은 일그러졌다. 자신을 묵사발로 만드는 그 상황도 어이가 없었지만. '대체 남자가 뭐라고, 몇년간의 한순간에 무너뜨릴 정도로 여자들간의 우정은 아무것도 아닌가'하는 허탈감에 한동안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고보니 그동안의 미팅 역사에서 궁중 암투를 방불케하는 치열한 신경전은 종종 있었다. 눈에 띄게 독보적인 남자라도 한명 있을라치면 전쟁은 더욱 과열 양상을 보인다. 때로는 가시돋힌 설전도 불사한다. 여우과와는 거리가 먼 재연씨는 늘 그런 전쟁에서는 '패전병'이 되어 너덜너덜해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튀어 나오는 말이 '여자의 적은 여자'(여적여)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남적남'도 적지 않으니까. 그냥 어디에나 자기 이해 관계에 따라 남의 뒤통수를 치는 야비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다만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종종 나오는 것은 여성들의 기질적인 특성과 무관치 않다. 상황에 따라서 어떤 사항에 대해 여성들이 더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점이 때로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결합되면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개인적인 상황에서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심하면 돈 좀 떼이고 관계를 단절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사회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다. 여자 동료나 여자 상사가 많은 사회에서 여전히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상당히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관점은 상당부분 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가부장적 사고, 남존 여비 사상과 관련이 된 경우가 많다. 과거 궁중의 암투가 판을 쳤던 것도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남자를 쟁취해야한다는 사고방식이 빚은 비극이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많아졌다지만 여성들의 유리천장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 심지어 같은 여성들끼리도 여성의 능력을 깎아내리거나 폄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의 인식 속에서 같은 여성들의 인식까지도 지배해 같은 여성을 무시하는 안타까운 현상도 종종 발생하는 것이다.


  재연씨의 회사에도 여성 상사들이 꽤 있다. 그런데 때로는 겉모습만 여성이지 속은 남성들의 사고 프레임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물론 엄혹하고 팍팍한 시대를 지나면서 그녀들의 나름대로 살아남은 방법이기도 하지만, 남성 상사들의 일하는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사고 방식마저 그대로 배운 것이다.

 

 재연씨는 사회 초년병때 여자 선배에게 '옷차림이 그게 뭐냐'를 비롯해 일과는 관련없는 외모나 행동에 대한 타박을 자주 들었다. 후배들을 붙잡고 자신의 뒷담화를 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그런데 그런 여자 상사들은 늘 남자 후배들을 더 어려워하고 더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물론 같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더 잘해달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왠지모르게 '여자는 못 미덥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다.

 

  수십년, 아니 수백년을 이어진 고부간의 갈등도 그렇다. 고부갈등은 과거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남존여비 사상으로 여성에 대한 불평등한 인식과 대우, 그로인한 시댁문화의 병폐가 원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적인 원인과 개선점을 찾지 못하고 피해를 당한 여성이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더 약한 여성에게 화풀이하면서 수백년간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진 결과다.


 물론 재연씨는 그동안 동성들과 더많이 만나고 관계를 맺고 있고 모집단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여성들 사이의 관계에서 더 많은 경험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남녀를 불문하고 오랜 신의 관계를 자신의 손익에 따라 쉽게 저버리는 사람, 질투와 시기감 때문에 친구에게 좋은 일이 있어도 외면하는 친구, '여자들은 이래서 안돼. 어디 믿고 쓰겠어?'라고 여자 후배들 뒷담화를 하는 상사들이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내가 진짜 위험에 처했을 때 손내밀 수 있고,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도 쪽팔리지 않고, 기쁜 일이 생기면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힘든 일이 생기면 함께 울어줄 수 있고, 남에게 말 못할 고민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동성 친구들이 있기에 재연씨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도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진정한 우정이 존재하고, 사회에서 남자들 못지 않게 서로를 끌어줄 수 있는 관계가 있다. 최근에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여성 스스로 여성을 바라 보는 시각, 여성들 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지고 있다. 여성들의 연대 역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때문에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저 오래된 명제도 이제는 바뀌어야하지 않을까. 이 또한 어쩌면 가부장제가 낳은 잘못된 산물이고 고정관념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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