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으로 한살 더 먹는 진짜 새해가 마침내 다가왔다. 아마 한국처럼 나이에 민감한 사회는 없을 것이다. 어른이 경험이 부족한 아이를 돕고, 아이는 그런 어른을 존경하는 아름다운 ‘장유유서’(長幼有序) 문화는 나이로 인한 위계 질서와 무게감만이 더 강하게 남아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해외 여행이나 취업, 유학, 이민 등 외국행을 결심하는 이유도 잠시나마 나이를 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6개월간 유럽에 머물렀을 때 아무도 나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본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그 외국 사람의 나이가 크게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만 오면 나이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때문에 한국에서 나이로 언니, 형, 동생의 관계로 빨리 친해질 수도 있지만 유독 ‘나잇값’을 요구하는 사회적 문화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 문구일 뿐, 여전히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이의 무게감에 짓눌려 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되는 ‘나이’에 대한 의미는 상당히 획일적이다. 대학때부터 2학년 말이나 3학년 초까지 애인이 안 생기면 기회가 없다는 식의 ‘2말 3초’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대학 4학년때부터 시든 꽃처럼 ‘나이가 많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들게 한다. ‘꺾인 오십’ ‘계란 한판’등 20대부터 나이에 섞인 자조적인 표현은 끝도 없다. 젊디 젊은 20대 중반부터 늘 '나이가 많아서'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여성들도 많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은 나이 어린 사람을 중시하는 일명 ‘영계’라는 말까지 낳았다. 나이로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는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은 떨어지지만 상황에 대한 이해력과 대처력, 경험은 더욱 쌓인다. 이를 무시하고 숫자로만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사회적 낭비이자 누군가에겐 '폭력’에 가까운 일이다. 해외에는 백발이 성성한 기자들이 기자와 앵커로 TV에 등장하지만 한국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주로 나온다. 나이 많은 남성 앵커 옆에 늘 20대 여성 아나운서를 앉히는 풍경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연애와 결혼에도 늘 ‘나이’가 중요한 이슈 중 하나로 부상한다. 최근에는 각종 영화와 드라마에서 연상 연하 커플이 많이 등장하면서 이에 대한 편견도 많이 사라졌다. 물론 이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명절때면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 결혼도 안하고 그러고 있느냐’라는 레퍼토리는 변하지 않았다. 또한 경쟁이라도 하듯이 10살, 20살 연하의 신부를 마치 훈장인 양 여기는 듯한 문화도 팽배하다.
8년전 늦가을, 만으로 50이 된 배우 이미숙을 만났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인터뷰를 하러 나온 그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외모에도 놀랐지만 온전히 여배우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 모습이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한때 이미숙은 결혼했다고 해서 기혼자 역할만 주는 것은 여배우에 대한 편견이라며 주연만 고집했다. 하지만 당시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 ‘에덴의 동쪽’, ‘웃어요, 엄마’ 등에서 엄마 역할을 소화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생각이 바뀐 계기를 물으니 “처음에는 내가 (‘에덴의 동쪽’에서)송승헌 엄마로 나온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러다가는 환갑이 될 것 같았다”면서 웃어넘겼다. 하지만 배우로서 장르나 역할 보다는 연기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였다.
이후 그녀는 매해 한두작품씩은 꼭 출연했고 최근 MBC 주말 드라마 ‘돈꽃’에서 정말란 역으로 카리스마 있는 연기는 물론 환갑을 앞둔 나이가 무색하게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로 화제를 모았다. “주연을 오래 한 사람들은 살짝 뒤로 물러서도 어떤 역이든 주연처럼 해내는 능력들이 있다”는 프로 의식은 그를 여전히 현역으로 뛰게한 것이다.
그때 그녀에게 돌려 묻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데뷔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나이 드는 게 속상하지 않냐고 물었다.
“물론 속상하죠. 여배우들에겐 왜 나이 먹었느냐고 질타까지 하는지 모르겠어요. 인생의 맛을 알고 멋을 아는 40~50대가 되면 연기자로서 표현의 폭이 더 넓어지는데 말이죠. 성에 차는 역할은 점점 줄어드는 것도 아쉽구요. 하지만 배우가 나이 드는 것을 받아들이되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것도 우리가 할 몫인 것 같아요. 나에겐 나이가 핑계나 타협의 대상이 되지 않아요.”
여자로서 매력을 잃지 않으면서 배우로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키고 싶다는 이미숙은 공백기에 하루 3시간씩 운동으로 다진 체력을 작품에 다 쏟아부은 뒤 기진맥진하고 다시 채우기를 반복한다고 했다.
그랬다. ‘고고녀’계의 큰 언니 이미숙은 그렇게 여자의 매력에 나이가 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증명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나이로 나를 판단하고 움츠려 드는 등 나이로 스트레스를 받기 보다는 나이 너머의 나 자신과 마주해보는 것은 어떨까. 나이라는 울타리를 걷어내면 그 안에 갇혀 있는 진짜 나를 만날 수 있다. 이젠 그 내면 아이의 짐을 내려놓고 토닥여줄 때다. 꼭 백세시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나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니까.
Q. ‘나이 스트레스’로 인해 힘들 었던 적이 있나요? 극복했던 비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