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눈이 번쩍 떠진 어느날 밤 새벽 3시.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은 밤. 우연히 들어간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요즘 한창 유행하는 아이돌 가수의 직캠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팬들이 직접 찍은 안무 영상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눈이 말똥말똥한 관계로 무심코 한번 눌러봤다. 그 속에서는 미소년이 청량감있는 미소를 머금고 파워풀한 안무를 추고 있었다. 아이돌이 춤추는 장면만을 따라간 카메라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로 뒤에 이어진 해당 아이돌 그룹의 군무를 보니 역동성과 에너지에 갑자기 우울한 기분이 싹 사라졌다.
그제서야 아이돌에 빠진 언니들이 하나둘 눈 떠오르기 시작했다. 10대때야 남자에 대한 판타지로 잠깐 마음을 빼앗길 수 있다지만 세상을 알만큼 아는 나이에 아이돌이라니. 처음에는 도무지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아이돌은 삶의 활력소이자 답답한 일상의 탈출구이자 취미 활동이었다.
그녀들에게 아이돌에 빠진 이유를 물으면 거의 대동소이하다. 1. 좀처럼 웃을 일 없는 일상 속에서 그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만면에서 자동 미소가 발사된다. 2. 회사나 사회에서 보이는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자들과 거리가 멀다. 3.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고 오직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4. 내가 원할때 언제든 팬질을 그만둘 수 있다.
회사 후배 L은 서른 중반의 나이에도 그룹을 바꿔가면서 아이돌 '팬질'을 하고 있다. ‘젝스키스’에서 출발한 그녀의 덕질은 '플라이투더스카이'를 거쳐 빅스‘, '워너원', 'JBJ'에 이른다. 물론 ’방탄소년단‘은 그녀의 고정픽이다. L에게 아이돌은 힘든 회사 생활을 잊게 해주는 비타민과 같은 존재다. 회사의 답답한 귄워주위적 문화에 지친 그녀는 마음이 지칠 때면 퇴근 후 아이돌 덕질을 시작한다.
아이돌 덕질에도 단계는 있다. 1단계는 바로 안방 덕질. 집에서 해당 아이돌의 유튜브와 트위터 등을 섭렵하는 것이다. 2단계는 현장에 투입된다. 가요 프로그램 사전 녹화를 찾아다니거나 콘서트를 찾아다닌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코어팬'(핵심팬)으로 분류되면 아이돌이 운영하는 사업체에도 찾아간다. 그녀는 십년 넘게 덕질 활동을 하게되면 가수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직접적으로 '오빠'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그제서야 대충 이해가 갔다. 남자들의 예술 작품에 '뮤즈'가 있다면 언니들에게는 '아이돌'이 있다는 것을. 그녀들에게 아이돌은 답답한, 시궁창같은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는 판타지라는 것을.
평소에는 알뜰 살뜰 사는 그녀들이 아이돌의 굿즈(기념품)에 지갑을 여는 이유도 대략 비슷하다. "그냥 회사에서 좋아하는 후배들 만나면 밥이나 커피 사주고 싶잖아. 그런 심리랑 같은거지 뭐.“
언니 K의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태민 사랑은 이미 십년이 넘었다. 비슷한 업계에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열리는 태민의 공연장을 빠짐없이 찾아다닌다. 관계자인만큼 가요 프로그램의 녹화 현장에도 찾아가 가수와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자 마음이 늙지 않는 비결인 셈이다. 그녀는 콘서트를 갈 때마다 수많은 태민의 굿즈를 일단 사서 큰 박스에 뜯지도 않고 일단 모아두고 본다.
이제는 아이돌은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주변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해외 콘서트를 하면 해외 여행 겸 따라가는 이들이 많다. 반대로 K팝 가수들이 공연을 하면 한국 관광 겸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많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아이돌의 팬질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사랑에도 조건이 난무하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자체가 행복하다는 것이다. 또한 아이돌은 잊고 지내던 자신들의 순수했던 젊은 시절의 열정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엄마의 눈치를 봐가며 '오빠'들을 응원하지 못했던 언니들은 30대가 되어 탄탄한 경제력을 갖고 맘껏 그들을 팬질한다. 물론 그 아이돌이 그럴만한 대접을 받을 정도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자기 관리를 잘 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빠순이'라고 욕하지마라. 어떻게 보면 그들은 지금의 한류를 있게 한 선봉이요. 대중문화계의 큰손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시작해 ‘HOT’와 ‘젝스키스’ 팬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K팝과 방탄소년단이 존재한다. 때문에 요즘 아이돌의 팬 중에는 '성덕'(성공한 덕후)들이 꽤 많다. 직업도 다양하고 자신의 분야에 전문가들이 많아 팬덤 문화도 상당히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이름으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각종 선행에 앞장서기도 한다. 이들이야말로 한국을 ‘K팝 보유국’ 즉 한류를 만든 장본인이다.
언니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이 오랫동안 사고 치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실망스러운 행동을 했을 때의 배신감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그들이 부디 인기에 취해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끝나지 않고 오랫동안 누나들의 판타지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