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여행
바다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아침이었다. 바스락거리는 하얀 이불에서 하얀 파도의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두 번째 리스본 여행으로 가슴은 벅찬 듯한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파도 소리로 착각한 탓에 어김없이 늦장을 부리고 만 것이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 쏴아하고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들이는 아침. 리스본의 울퉁불퉁한 돌바닥이 따스한 빛을 내뿜기라도 하는 듯하다. 3일간 머무는 이번 호텔에서는 조식 신청을 하지 않았다. 리스본에는 여행자들의 취향을 담은 작은 브런치 가게가 많다는데, 호텔 조식을 먹은 날은 매번 그런 가게를 지나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 감성 물씬 풍기는 과일과 야채, 한 잔 마시면 생기가 돌고, 한 입 베어 물면 에너지가 솟아날 것 같은 그런, 건강에 좋고 신선한데 예쁘기까지 한 식탁 앞에 앉아보고 싶었다.
이 작은 가게는 이름마저 싱그럽다. 하루쯤은 로컬 음식이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 베지테리언이라면 더더욱, 여행자에게 소소한 기쁨을 안겨주는 <Frutaria>로 가자. 아무리 타파스 느낌을 겨냥한 한 끼 식사라지만 그날따라 양껏 욕심을 부린 것 같다. 평소엔 많이 먹지도 못하면서 1인 1 주스도 모자라 커피까지 주문하고는, 1인 2 메뉴씩 클리어하다니. 그럼에도 너무 배부른 느낌보다는 오히려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고 하면 왜곡된 기억일까?
아침 식사를 하고 나오며 맞는 차가운 바람과 대조적인 햇살에 다시 한번 정신을 못 차린다. 7일짜리 리스보아 카드(Lisboa Card, 트램과 버스를 탈 수 있는 교통카드)를 사려면 호시우 광장 근처에 있는 Tourist shop으로 가면 되는데, 발걸음은 그 반대인 코르메시우 광장(Praça do Comércio)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앗'하고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광장 게이트 가까이 다다랐을 때였다. 그때 발견한 어떤 이의 거리 퍼포먼스란!
인디언의 이끌림에 여기까지 왔다면, 그래서 그 덕분에 한 번 더 웃었으니 눈인사만 하고 얼른 되돌아간다. 벨렘 지구에 가려는데 벌써 정오에 가까워진 시계를 보고는 발걸음도 빨라졌다. 그런데 이상하지, 넋 놓고 -다시 한번 햇살 탓을 해본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 나는, '호시우 광장' 앞의 카드 파는 곳을 두고는 '호시우 지하철역 (지하 계단)'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는 또 지하철역 반대 입구로 나와버렸는데... 글쎄, 발걸음이 나를 이끈 곳은 <Mercado da Baixa>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열리고 있는 오픈마켓이었다.
'와아-'
갈 길을 (또) 잊은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마켓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치 원래 일정에 있었다는 듯이, 눈 동그랗게 뜨고 두리번거리는 건 조금 참고 자연스럽게 마켓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나는 여행지에서 만난 마켓에 탐닉한다.
무려 1855년부터 이어져오고 있다는 바이샤 마켓은 포르투갈 전통 음식으로 가득한 전통시장이었다. 푸드코트와 비슷한데, 전통음식이나 간식거리를 팔기도 하고 그 앞에서 직접 요리를 하기도 한다. 아무렇게나 매달려있는 치즈 덩어리들이 멋있어 보이고, 포르투갈 전통 훈제 소시지(링구이사, Linguiça)를 종류별로 담고 있는 쇼케이스는 통째로 가져가고 싶고, 와인과 맥주는 저렴하게 한 잔씩도 팔고 있으니 그냥 지나치기 힘든데... 어쩌지, 트램 타고 벨렘 지구 가야 하는데! 그래서 찾은 합의점은 야무진 과일 조각 담긴 상그리아 한 잔이었다. 슈퍼복 맥주 한 병을 3유로 이내로 살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5유로짜리 작은 한 컵 상그리아는 비싼 듯했지만, 괜찮다. 이건 포르투갈 바이샤 마켓에서만 우연히 맛볼 수 있는 무려, White Port Sangria니까.
이제 진짜 벨렘 지구로 가자.
트램과 버스, 일부 관광지 입장료까지 커버되는 옵션으로 리스보아 카드를 구입했다. 버스는 어디서 타더라? 검색을 하면 됐었는데, 길치의 특성을 못 버리고 나는 굳이 내가 아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인디언이 있던 코르메시우 광장 근처다. 호기롭게 버스에 오르고, 삐익- 카드를 대고, 자리에 앉았는데, '앗!' 버스는 내가 아침 식사 한 곳을 거쳐 상그리아를 샀던 오픈 마켓으로 나를 데려가네? 심지어 거기가 종점이란다. 서울에서도 종종 반대방향 지하철을 타곤 했던 나를 누가 탓할 수 있을까.
종점에서 다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의 맨 뒤 창가 자리에 앉아 열아홉 정거장쯤 달렸던 것 같다. 창가로 쏟아져내리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오늘 하루 햇살이 내게 저지른 장난에 대하여 생각하며.
제로니모스 수도원에서 내렸는데, 한국인 남자 세 명이 눈 앞에서 지나갔다. 분명히 아까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가던 그 한국인이 맞는데,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먼저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니!
나의 오늘 하루의 취향은 햇살 따라 걷는 길로 하자. 벨렘지구에서는 또 어떻게 길을 잃어볼까.
*오늘도 방문하여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