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장편소설
또 한 명의 주정뱅이가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위해 날마다 술을 퍼마시는 남자 한탸의 이야기는 문자와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닌 나 같은 현대인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시끄러운 고독 속의 개인’은 내부적인 고립감에 번민하는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과 묘한 짝을 이룬다. 이들은 인터넷 매체 혹은 책을 통해 자신과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겹침이 없는 낯선 개인들의 삶에 심적으로 깊숙이 관여하게 되는 참으로 피곤한 삶을 영위한다. 메릴랜드의 한 작은 아파트에서 11인치 랩탑의 스크린을 통해 매주 토요일 광화문 촛불 집회에 나 홀로 참가하느라 새벽을 설치기도 하고,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친일 프레임 탓에 법정 소송이라는 어이없는 학문/사상의 자유의 침해에도 불구하고 침묵하는 대한민국 학자들 때문에 분통 터져 소화불량에 시달리기도 하고, 얼마 전 다시 읽은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의 무(無) 윤리성이 타락 전의 아담과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 까하는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 며칠 밤을 지새기도 하고, 하다못해,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르틴 루터가 예술의 합목적성만을 인식했을 뿐 예술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기독예술분야가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스스로 내리고 모든 탓을 그에게 돌리느라 곰탕을 냄비채 태워 먹기도 하니… 맨날 집에서 도대체 혼자 뭐하냐는 지인들의 애정 어린 질문에 ‘바뻐’ 라는 나의 대답은 거짓말도 농담도 아닌 진실에 가깝다 하겠다.
이 책의 주인공 한탸는 폐휴지를 압축하는 공장에서 30년을 홀로 일하면서 고독한 삶을 살아간다. 폐휴지 속에 우연히 섞여 들어온 보석 같은 책들을 통해서 그는 시대를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을 만나고 그들과 만나기 위해서 고독을 즐긴다.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은 비워냄을 통해 삶을 재충전하려는 현대인들의 웰빙 처방으로서의 고독과도 완연히 다르다. 그의 단순한 삶은 꽉 채워진 충만한 다른 세계를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현실의 삶이 그리 녹록지는 않다. 충만한 저 쪽 세계에 온전히 빠져들기 위해서 그는 약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바로 ‘술'이다. 아마도 작가 흐라발의 삶이 투영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늙은 몽상가는 궁극적인 실존의 해방을 위해 스스로 삶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끊임없이 술을 마신다. 이 책을 읽으니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늘 지니고 다니시며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또 읽으셨던 분철한 성경책을 한 손에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취기가 사라질세라 연거푸 소주잔을 비우셨다.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가고 싶었던 아버지의 저쪽 세계는 무엇으로 가득 차 있었을까? 나는 홀로 고독한 가운데 몽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번엔, 주정뱅이 아버지를 만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