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세이 Vol. 02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특별하게 천재적인 재능을 찾지 못하고, 남들이 하는 대로 달려왔다.
막연하게나마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가고 싶다는 목표의식이 어릴 때부터 생겼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덕분에 주변에서의 별다른 압박 없이도, 사회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로 어쨌든 학습은 했다.
학문과 공부가 아닌 학습!
앎을 삶으로 당겨오는 과정이 아니라 준비! 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부모님이 시켜서 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당장 할 줄 아는 게 공부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때 올백(이 말을 요즘도 쓰나 모르겠다. 모든 과목 100점을 맞았다는 뜻)을 3번인가 맞았던 거 같은데, 그때마다 칭찬받는 게 좋아서 어쩌면 성적을 최대한 잘 챙겨보려 했던 것 같다.
물론, 세상에는 너무나 천재가 많다. 정점에 서지 못했다.
100% 희망했던 중학교나 고등학교로의 진학은 실패했으나, 차선의 차선을 거쳐 결과적으로 대학교 진학에 있어선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대학 이야기를 하면 어딘가에서 나오는 단골 주제가 역시나 학교 서열, 문이과 유불리 이런 것들인데 남에게 인정받는 대학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고, 고등학교 때 자기객관화를 마친 이후에 설정했던 나의 목표는 달성했기에, 나의 확신을 증명했기에 만족하는 결실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옥스포드였나 예일이었나 가겠다 당당하게 외쳤지만, 이건 세상 물정 몰랐던 꼬마의 버르장머리라 생각하자)
한창 성적 문제 때문에 힘들어서 심리적으로 방황했던 고등학교 2학년 후반기에 아버지께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는 진지한 분위기에서 "대학만큼은 잘 가면 좋겠다. 처음 해보는 부탁이다." 라고 말씀하셨던 건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다.
평생의 적이었고 성인이 되어선 다시 안 만나리라 다짐했지만, 결국 다시 마주할 수학에서의 아쉬움
기계적으로 24시간, 매분 매초를 학습에 투자할 수 있었을까란 미련
이런 것들은 전부 배제하고 생각하더라도, 지금도 어디 가면 당당하게 말한다.
"입시판에 다시 들어가느니, 재입대를 하겠다고. 진심이다."
그렇게 19년(초등학교 이전 영유아기 빼면 12년?)을 '대학입시'와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아니, 그런데 글 제목이랑 너무 내용이 안 맞는 거 아니냐.
대외활동과 대학입시에서 비슷한 건 앞글자가 똑같다는 거 말고 없지 않느냐.
사실, 서론이 길었다.
약관의 나에게 누리소통망(SNS)이란, 대외활동이란, 대학입시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입시에 투자했던 노력과 이로 인해 발생했던 스트레스 총량이 앞의 두 가지의 그것들과 같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아주 큰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남들이 다 하니까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시작했다는 것.
서포터즈, 기자단, 홍보대사 등 이름도 여러 가지에 정부 부처와 지자체부터 대기업, 사단법인, NGO까지 민관을 막론하고 모집 공고 올리는 곳들도 다양하다.
적법하게 예산을 만들고, 태우기도 좋은 게 청년이 주체인 활동인 데다가 세상 어느 단체든 양지에 있기만 하다면야 본인들의 이름을 알리는 홍보 효과 및 파급력 향상을 꺼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효과적인지는 둘째 치고, 속는 셈 치더라도 꽤 시도해보기 좋은 아이템 아닌가.
이런 대학생 대외활동의 대부분은 기업의 직무로 따지면 홍보/마케팅과 직결된다.
고작해야 학부생들에게 무엇을 맡길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당연한 연결이다. MZ스럽게, 청년의 통통 튀는 감성으로 콘텐츠 제작하는 건 대외활동이 아니라 인턴 같은 걸 하더라도 많이들 요구하는 상황이다. 나이가 어리다고 청년의 감성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르신께선 그래도 그 나이면 당연히 능숙하리란 기대가 있는 듯하다. 활동하며 정말 카드뉴스를 찍어내는 양산 공장과 같은 분들도 꽤 만나뵀다. 이 분들은 보통 진정으로 직무에 뜻이 있거나, 나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하다가보니 일종의 중독에 걸려 대외활동에 계속 투신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대외활동을 시작했는가.
아무런 대책 없이 노는 족속들이 아니라면
{역량} = {전문성 + 네트워크 + 자본 + 실적}
이 등식의 항을 하나씩 갖춰나가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지닌 게 대학생인 만큼 당연히 불안해진다.
대학은 왔는데 막상 하고 싶은 일은 없고, 학문의 전당은 무슨 뭐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고, 그런데 남들은 자의든 타의든 무언가 하고 있고, 빼곡한 캘린더를 보며 바쁜 척을 해야 하고, 카톡/DM이 쌓여 있어야 나도 제대로 캠퍼스 라이프를 보내고 있는 거 같고, 학교 안에만 있으면 눈이 좁아지니 밖에서도 이것저것 해봐야 할 것 같고, 그런데 또 나중에 서류에 무언가를 쓰려고 하면 한없이 부실하기만 하고...
대학 와서 학점은 거의 놓았지, 그렇다고 머리 밀고 고시를 준비한 것도 아니지, 뚜렷한 취업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
분명 실재하지만, 확연하게 보이지 않는 여기저기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그러니 당장 눈에 보이는 무언가, 끝에 수료증이든 상장이든 하나라도 남는 것 중에서 가장 만만한 걸 찾다보니 어느새 대외활동에 지원서를 넣고 있었다. 첫 대외활동을 시작할 시기에 군대 전역과 코로나가 겹쳐 뭐라도 새로운 도전과 유대관계의 형성이 간절하기도 했고.
(물론, 되는 대로 난사하지는 않고 마지막 자의식을 유지해서 나름대로 분야별 로드맵을 세워 적절한 트랙에 해당되는 활동들 위주로 진행하긴 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들에 분골쇄신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 했느냐 물으면 솔직히 맞다고 대답하진 못하겠다.)
그리고 깨달은 점.
대외활동에서 지원자를 선별할 때 어쩔 수 없는 현실.
누리소통망의 팔로워 수는 자격증과 더불어 사실상 거의 유일한 정량적 평가 지표이다.
인플루언서도 막대한 권력이고, 능력의 표상이다.
자기PR의 관점에서 보면, 현 시대는 자신이 브랜드가 되는 것을 덕목이자 소양으로 요구하기도 한다.
게다가 사이버 공간에서는 수없이 많은 정체성을 창조할 수 있고, 여기서 생성되는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는 측정 불가능하니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말일까?
그렇지만,
숫자가 거짓말을 하는 곳이 바로 이 대외활동과 누리소통망이라 생각한다.
통계의 오류와는 조금 다른 맥락이다.
선팔하면 맞팔, 팔로워 구매 뭐 이런 걸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미 일부는 인스타 문화 그 자체가 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Q1. 보편적으로 운영되는 대외활동 계정의 수요자는 누구인가.
A1. 같은 대외활동 계정이다.
*물론, 개중에서도 디자인이나 마케팅 측면에서 훌륭한 셀링 포인트를 뽐내며 성장하신 분들도 있다. 모든 대외활동 계정을 내 입맛대로 일반화하고 싶지 않다.
Q2. 대외활동을 계획한 기관의 수요자는 누구인가.
A2. 기관의 취지에 동조하거나, 정보가 필요하거나, 어찌 되었든 기관을 알고는 있고, 더 알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다. 넓게 보면 일반 국민/시민까지도.
Q3.그렇다면, 기관의 활동에서 제작된 콘텐츠가 머리를 돌려야 하는 방향은?
A3. " "
모두가 이 공란의 답을 아는 1점짜리 문제다.
2021년과 2022년, 2년 동안 대외활동을 한 뒤에 마지막에 몰려온 감정은 근본적 의문으로 귀결되는 공허함이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계정과 콘텐츠의 궁극적인 타겟이 구분되어선 안 된다는 소신을 굳히기에 이르렀다.
일반적인 누리소통망 운영에서야 정말 당연한 사실이다.
어디 가서 인플루언서로의 성장 전략 강의한답시고 이런 소리하면 환불해달라는 컴플레인이 빗발칠 터.
그런데 대외활동이란 분야에서는 이 활동이라는 명분 아래에서 모든 집합이 허용되고, 유독 그 안의 원소들은 간과되는 것 같다.
그렇기에 누리소통망과 대외활동은 상보적 관계임은 분명하나, 필요충분의 관계는 아니라 결론짓고 싶다.
수십, 수백 개의 대외활동을 쳐내고, 팔로워도 K나 M이 붙는 분들께 이런 주절주절은 실패자의 변명으로 들릴 수도 있다 생각한다.
내가 대외활동을 10개 했다 가정했을 때, 11개를 했을 때 보이는 걸 깨닫지 못해서 든 생각일 수도 있다.
홍보와 마케팅에 관해 누구를 가르치고자 이 글을 남길 마음은 추호도 없다.
괜히 주류에 반항하려 하고, 남들과 똑같아지지 않겠다고, 비범인이 되겠다고 부리는 객기로 보일 수도 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사회 체제에 순응하는 것은 대학입시로 충분했다.
정체를 흩트리겠다는 사람이 남들이 깔아주는 레일대로만 걸어가는 건 재미없지 않은가. 아무리 돌아가더라도 결국에는 끝에서 나의 길을 찾아내리란 믿음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희극만을 보고 자신의 인생에서 비극만 조명하는 것은 슬프지 않은가.
열등감과 허영심은 경계하되, 희극을 보며 웃고, 더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내 인생이란 무대에 맞추어 각색할 수 있다면, 훌륭한 한 편의 작품이 또 새롭게 시연된다.
그 다음에는 극장에 걸리길 지켜보는 설렘을 간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