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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린 Dec 21. 2018

니체와 차이의 철학

즐거운 철학하기 : 진은영, <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그린비) >


혹자는 자신의 결핍에서 철학을 하고, 또 혹자는 자신의 풍요로움과 활력에서 철학을 한다.”

                 - 니체, <즐거운 학문> 제2판 서문


벤야민의 책을 털고 손에 쥔 책은

진은영,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오래 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은영 언니의 박사논문을 이제야 비로소 다 읽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때 나는 한국에 없었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엔 가급적 들뢰즈의 세계로부터 애써 멀어지려 했었다. 내 의식이 한 곳에 오래 정박해 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았고, 아프고 고단한 생활이 길어진 탓에 의도치 않게 몸에 밴 엄숙하고 진지한 제스츄어들을 가급적 버리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 무렵의 고민들이 무색하고 무안할 정도로 수려한 필체와 단단한 사유의 책.


여담으로, 잘 알려진 시인이며 철학 연구자인 은영 언니와는 수유너머에서 처음 만나 이진경 선생님이 진행하시는 <차이와 반복>, <천의 고원> 세미나를 같이 들었었다.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던 학부 4학년 때였는데, 잘 아는 한의원을 소개해주셔서 학부를 졸업한 후에도 몇 년 간 연신내를 오가기도 했더랬다. 같이 들뢰즈를 공부하던 소싯적의 기억과 그 시절의 언니의 관심사가 글 안에 진득하게 묻어있는 것 같아, 읽는 내내 향수에 젖었다. 시인이라거나 선생님이라는 공적인 호칭을 써본 적이 없어 부르는 말이 잠시 사적이었던 것을 양해 바라며.


책은 동일성 혹은 보편성이라는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근대적 사유의 폐혜를 극복하고자 시도한 니체의 ‘차이’와 ‘생성’의 철학을 통해, 근대적 지배전략의 주요한 형식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탈근대적 실천 이론을 구성하는 것을 수행 과제로 삼고 있다. 용수의 ‘공’ 사상과 들뢰즈의 니체 해석을 통해 차이의 철학이 갖는 새로운 정치철학의 함의를 탐구하고, 근대적 니힐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 이론을 모색하고자 한다. 더불어 변증법 비판을 위한 전략으로써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통해 근대적 사유가 봉착한 니힐리즘의 문제를 문제화한다.


니체에게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 사상의 ‘영원성 추구’는 일종의 니힐리즘에 가깝다. 니체는 인간의 사멸성을 극복하기 위한 구제의 방안으로 초기에는 예술적 구원과 문화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보존하기 위해 모색하지만 그것이 현존의 정당화에 머무른다는 점에서 불충분한 방법임을 깨닫고 ‘영원회귀’라는 새로운 사유를 통해 니힐리즘의 극복을 꾀하려 한다.


그는 영원회귀를 통해 전통적 인과 관념을 거부하고 니힐리즘의 근대적 형식으로서의 근대 과학의 논리 역시 비판한다. 곧 ‘인과적 연기론’을 부정하는 용수의 공 사상을 통해 영원회귀에 대한 통념적 오해를 해명함과 동시에, ‘찰라론’에 대한 비판을 경유해 영원회귀 사상의 실천적 사유에 접근하려 한다. 또한 책은 들뢰즈의 니체 해석을 토대로 근대적 지배전략인 변증법적 사유를 해체하고 수동적 니힐리즘을 극복하는 방도로써 ‘차이의 정치학’이 갖는 중요한 특징들을 서술하하고 있다.


변증법적 실천운동에서는 투쟁, 즉 대립 개념을 항상 전제하고 당연시하지만, 차이의 철학은 실천을 위해 대립자가 늘 필요한지를 반문한다. 대립이 아닌 ‘이행과 변화를 표시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며, 이 차이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차이, 즉 한 개체에 본질적인 생물학적 특성에 근거해 발생하는 차이가 아니다. 변증법적 대립은 차이를 이항적 대립으로 ‘가상화’함으로써 발생하며, 이 가상화에 활용되는 정조가 바로 ‘공포’라는 것이다.


폭력과 증오의 경험이 ‘동일성의 정치학의 극단적 형식(크리스테바)’으로 표출되는 현대 사회에서, 이 차이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철학적 임무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사유를 바로 이 ‘생성과 차이의 긍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책은 철학적, 정치적 담론을 논의로 하고 있지만 문학적 수사들로 가득하다. 니체 특유의 시적 표현과 아포리즘적 서술로 모호하고 오인되기 쉬운 영원회귀 사상을 불교적 사유와 들뢰즈를 경유하여 가급적 해석 가능한 언어로 제시하는 이 책은 동시에 들뢰즈적 수사법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니체의 영원회귀, 혹은 들뢰즈의 니체 해석에 관심은 있으나 장벽이 높아 망설이는 이들에겐 뜻밖에도 너무나 친절하고 고마운 해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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