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공기가 말랑말랑 해지는 시간
두 달에 한 번, 비데 점검이 있는 날이다. 날짜와 시간을 잡는 짧은 통화에서도 그의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도착 직전 걸려온 확인 전화는 단순한 친절이라기보다, 혹여 마주할지 모를 누군가의 날 선 반응을 미리 방어하려는 생존의 습관처럼 느껴져 마음 한구석이 쌉싸름했다.
젊은 날의 나였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목소리의 떨림을 이제는 가만히 헤아려 본다. 나이가 든다는 건 마음의 근육이 유연해지는 일일까. 예전보다 타인의 입장을 살피게 된 나를 발견할 때면 스스로도 낯설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고단함에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은 놓지 않으려 한다.
집에 도착한 코디네이터는 부담스러운 정도로 예의 바르게 인사하더니,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화장실로 향했다. 작은 가방 속에서 나온 도구들은 그의 능숙한 손길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좁고 습한 화장실, 남의 집 변기를 닦기 위해 내내 쪼그려 앉아 무릎 한 번 펴지 못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감사함보다 미안함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어릴 적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빈손으로 남의 집 문턱을 넘지 마라", "내 집에 온 객을 그냥 돌려보내지 마라." 요구르트 한 병이라도 건네야 마음이 편해진다던 어머니의 그 유별난 다정함이 내 몸에도 배었나 보다. 나 역시 누군가를 방문할 때면 소소한 것이라도 꼭 챙기게 된다. 목적 없는 배려가 상대의 표정을 바꾸고, 무엇보다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혀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날은 유독 날이 차가웠다. 냉장고에 캔커피 두 개가 있었지만, 찬 음료를 그대로 내미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서둘러 대접에 뜨거운 물을 붓고 캔커피를 툭, 던져 넣었다. 커피가 데워지는 동안 화장실 안에서는 작업을 마무리하는 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일을 마치고 서둘러 떠나려는 그에게 온기가 오른 캔커피를 쥐어주며 "수고하셨습니다. 날이 추운데 이것밖에 없네요." 나의 말에 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예상치 못한 환대를 만난 듯, 이내 얼굴 가득 고마움의 미소가 번졌다. 차가웠던 캔커피가 내 손을 거쳐 그의 손으로 넘어가는 순간, 우리 사이의 공기는 비로소 말랑해졌다.
그가 떠난 뒤 문을 닫고 돌아선 내 손바닥에는 여전히 커피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온기는 내게도 남은 하루를 버틸 에너지가 되어주었다. 그가 다음 집의 초인종을 누를 때, 아까의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이 그의 언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여주길 바란다. 오늘 하루만큼은 그의 고된 노동 뒤에 무례함 대신 다정한 위로가 기다리고 있기를. 캔커피의 온기가 닿는 거리만큼만이라도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해지기를 빌어본다. 다정함은 결국 전염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