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의 시간은 짧지 않기에
나른한 오후, 창밖으로 비껴드는 햇살이 책상 모서리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소리 없이 먼지가 부유하는 고요 속에서, 텔레비전 화면 속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평소 나는 세속의 소란을 등지고 수도의 길을 걷는 이들의 삶을 다룬 영상을 즐겨 보곤 한다. 스스로 선택한 고독 속에서 그들이 길어 올리는 맑은 영혼의 소리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날의 주인공은 일곱 명의 수녀가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어느 산촌 마을에서 동료 수녀들을 이끌며 삶의 터전을 일구어가는 수녀님이었다. 공동체의 기틀을 닦고 생활을 이끄는 단단한 리더의 모습이었지만, 그녀가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에피소드에서 이야기는 결을 달리한다. 아흔이 넘은 노모는 집 앞 텃밭에서 시간을 보내다 수녀인 딸을 보자 "왔구나" 하며 무뚝뚝하게 내뱉었지만, 반가움은 역력했다.
다만 반가움보다 먼저 터져 나온 것은 조심스러운 잔소리였다. 어릴 때였으면 호된 꾸지람이 앞섰겠지만, 아무리 제 자식이라도 수도자의 몸이니 함부로 말할 수 없는 터였다. 그래도 아흔의 노모에게 딸은 신을 섬기는 거룩한 존재이기 이전에, 그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잠자리는 춥지 않은지 늘 마음이 쓰이는 '철부지 늦둥이'였다. 하룻밤 자고 가라는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길을 나서는 딸의 손에 노모는 주름진 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걱정 보따리를 한가득 들려 보냈다. 멀어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노모의 눈빛은 바람 없는 곳에서도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롭고도 지극했다. 그 찰나의 정경이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찔렀다. 순간,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이 나의 그리움과 겹쳐지는 파동을 느꼈다.
내 어머니는 당신의 막내를 끝없는 '애달픔'으로 키워냈다. 남편의 무심함과 일찍 집을 떠난 다른 자식들 사이에서,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곁에 끼고 당신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삼키며 버텨냈다. 당신의 남은 모든 사랑을 막내에게 토하듯 쏟아낸 것이다. 어머니의 서러움은 부엌 도마 위에서 잘게 다져졌고, 그 빈자리는 나를 부르는 온기 섞인 목소리로 채워졌다. 목욕을 다녀오면 "목욕 다녀왔니?", 퇴근한 내게는 "배고프다, 어서 씻고 밥 먹어라" 하며, 당신의 사랑이 바닥날 때까지 사랑을 말했다. 어머니는 눈으로 말했고, 어느 날은 깊은 숨소리로 말했다.
세상의 모든 막내는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짧다. 부모에게는 당신이 떠난 후 남겨질 막내에 대한 안쓰러움이 늘 서려 있다. 남은 시간이 짧으니 막내에게 줘야 할 사랑은 더 크고 아련할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목소리엔 평생을 품에 안고 놓지 않으려 했던 간절함이 눅진하게 배어 있었다. 마치 고목의 뿌리처럼 나를 지탱해 주던 그 사랑은, 세월이라는 거친 물결 속에서도 여전히 나의 가장 확실한 닻이 되어주었다.
어머니는 늘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거실을 닦다가도, 빨래를 널다가도 혹여 막내의 전화벨 소리를 놓칠까 귀를 기울였다. 마트나 병원을 다녀올 때도 신발을 발로 차듯 벗으며 급히 들어오곤 하셨다. "여보세요, 아이고 우리 막둥이" 하는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는 온종일 기다린 끝에 찾아온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 어머니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한 채 한 켠에 있던 저금통을 만지셨다. 동전들을 하나하나 골라내어 학교 갈 차비와 점심값을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의 고개는 점점 아래로 숙여졌다. 그것은 부족함밖에 쥐여주지 못하는 지독한 미안함이었다. 나는 그 무안함을 보듬어야 할 안쓰러움으로 받아들이며 어른이 되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집이라는 동굴로 숨어들었을 때도, 어머니는 왜 도망쳤느냐 묻지 않으셨다. 대신 그 동굴 입구를 당신의 마른 등으로 지키며, 세상의 바람이 내게 닿지 않게 나직한 숨소리로 나를 재우셨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더 이상 그때처럼 나의 방패가 되어주지 못한다. 어머니의 성대는 녹슨 현악기의 낡은 줄처럼 늘어져 버렸고, 단단하던 목소리는 아기의 입벙긋과 같아졌다. 어머니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 이토록 큰 부재임을 미처 알지 못했다. 어머니의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차오르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요였다.
TV 속 수녀가 차 안 가득 어머니가 싸준 짐을 싣고 집을 나선다. 노모는 막내딸이 사라질 때까지 서 있고, 수녀는 룸미러로 그런 어머니를 보며 다시 길 위로 돌아간다.
말을 잃은 어머니와 그 부재를 맞닥뜨린 막내는 서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삶의 방식을 바꾸었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살을 수시로 비비며 체온으로 대화한다. 이게 진짜 대화라는 걸 깨닫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어머니의 웅얼거림을 통해 나는 그 마음을 읽고, 무뚝뚝했던 아들은 말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기꺼이 수다쟁이가 된다. 그 침묵의 대화 속에서 어머니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헤어질 때면 소리 없는 목소리로 "밥 잘 챙겨 먹어" 하며 나를 보낸다.
이제 김치통은 바닥을 드러냈고, 과일도 예전의 그 맛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소리 없는 목소리에서 여전히 가장 맛있는 밥을 먹는다. 막내의 시간이 짧은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물리적 세월이 조금 부족했을 뿐이다. 시간이 다하기 전까지 우리의 대화는 계속될 것이며, 사랑은 더욱 지독하고 선명해질 것이다.
나는 이제 그 선명한 목소리의 유산을 품고 다시 길을 나선다. 어머니가 남긴 목본(木本) 같은 메아리가 내 발걸음마다 울리고 있으니, 나는 결코 홀로 걷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