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완성하는 사소한 것들

나의 '반려 물건'에 대하여

by 이리리

시작하며 : 내 안식의 좌표를 찾아서

김정운 교수의 저서 『남자의 물건』에는 누구나 알법한 명사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내놓은 물건은 대단한 골동품이나 보석이 아니다. 그저 손때 묻은 만년필, 낡은 수첩처럼 일상을 함께하는 평범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 사소한 사물 안에는 주인만의 확고한 인생관과 치열했던 삶의 흔적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책을 덮으며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험한 세상에서 나의 숨통을 트여주는 안식의 물건이 내게도 있는가?"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닌, 내 의지와 우연이 겹겹이 쌓여 이제는 내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들. 집안 곳곳을 뒤지며 나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할 '반려 물건'들을 하나씩 불러냈다.



01. 선명한 푸른색의 고집, 빅 라운드 스틱 볼펜


가장 먼저 손에 잡힌 것은 흰 몸체에 파란 뚜껑을 가진 볼펜 한 자루다. 20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내 손을 거쳐 간 '빅 라운드 스틱'. 누군가는 왜 하필 그 저렴한 볼펜이냐 묻겠지만, 1mm 굵기의 볼에서 끊김 없이 흘러나오는 잉크의 질감은 그 어떤 고가의 만년필보다 정직하다.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면서도 적절한 마찰을 남기는 그 손맛은 결코 질리는 법이 없다.


왜 청색이냐는 물음에는 과거 동남아시아에서의 기억이 답한다. 검정보다 파란 잉크를 '노멀'로 사용하는 그곳의 문화를 접하며,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인쇄 양식과 대비되는 파란 글씨의 높은 가독성에 매료되었다. 그 후로 나는 파란색 볼펜을 고집하게 되었고,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한 다스씩 사서 모아둔 이 구형 모델이 이제는 '근사한 사치'가 되었다. 매일 아침 메모패드에 파란색으로 날짜를 적는 행위, 그것은 오늘 하루도 내 방식대로 살겠다는 나만의 작은 의식이다.



02. 유행보다 나다운 실속, 와이즐리 면도기


중학교 때부터 거무튀튀한 수염이 또래들보다 확연히 많이 났다. 남들보다 족히 삼사 년은 일찍 면도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 셈이다. 아버지의 양날 면도기에서 시작해 백 원짜리 일회용 면도기, 그리고 질레트와 쉬크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를 두루 거쳐왔다. 하지만 비싼 면도날의 가격은 늘 부담이었다.

그러다 운명처럼 '와이즐리'를 만났다. 거품을 뺀 가격에 훌륭한 절삭력. 모두가 유명 브랜드의 이름값에 기댈 때, 나는 합리적인 실용을 택했다. 면도날을 아끼지 않고 자주 갈아 끼우며 매일 아침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는 평화. 내 주변 누구도 쓰지 않기에 오히려 더 특별해진 이 면도기는, 남의 시선보다 나의 만족을 우선시하는 내 삶의 태도를 닮아있다.



03. 노란색 종이 위의 자유, 옥스퍼드 메모패드와 가죽 커버


나는 글씨를 꽤 잘 쓰는 편이다. 학창 시절 미화부장을 도맡고 동기들의 '족보'를 책임지던 필기 실력은 사회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하지만 날짜가 정해진 다이어리는 늘 답답했다. 많이 쓰고 싶은 날은 칸이 모자랐고, 쓰기 싫은 날의 빈칸은 부채감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발견한 노란색 '옥스퍼드 메모패드'는 내게 해방감을 주었다. 들리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가다 모자라면 다음 장으로 넘기면 그만인 자유로움. 여기에 묵직한 가죽 커버를 씌우니 비주얼 또한 근사해졌다. 십 년 넘게 손때 묻은 가죽 커버를 열고 노란 종이 위에 파란 볼펜으로 일정을 정리할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내 시간의 주인임을 실감한다.



04. 영혼을 담는 그릇, 텀블러와 파우치


가방 안쪽 깊숙한 곳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것들도 있다. 매일 커피를 담아내는 텀블러와 소지품을 정리해 주는 작은 파우치가 그것이다.

유행에 따라 텀블러를 수집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게 텀블러는 '한 번 사면 끝까지 가는' 우정의 상징이다.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내부의 커피색은 내가 통과해 온 카페의 공기와 시간의 농도가 배어있는 훈장이다.

파우치 역시 마찬가지다. 충전기, 이어폰, USB 같은 소소한 것들을 질서 있게 담아주는 이 작은 주머니는 외출할 때마다 내 마음의 안정을 보장한다. "이것만 있으면 어디서든 연결될 수 있다"는 안도감. 이들은 내 일상의 보이지 않는 톱니바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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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 담긴, 카키색 가방 안의 어머니


하지만 내게 가장 귀한 물건은 최근에야 내 삶으로 들어온 '카키색 가방'이다. 3만 원대의 소박한 이 가방 안에는 내 소지품 말고도 어머니의 물건들이 함께 숨 쉬고 있다.

갑작스레 찾아온 병마로 인해, 어머니의 물건들은 더 이상 주인의 손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미소 지은 표정이 선명한 어머니의 신분증, 아프기 전날까지 사용했던 신용카드, 그리고 우리 가족의 이름이 단축키로 저장된 낡은 휴대전화. 이 물건들은 이제 내 가방 속에서 나와 함께 길을 나선다.

마트를 갈 때도, 친구를 만날 때도, 도서관에 갈 때도 나는 이 가방을 잊지 않는다. 가방 안의 어머니 물건들이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감각. 그것은 어머니가 여전히 어머니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그리고 내가 여전히 아들로서 곁에 있다는 가장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증거다. 이 물건들이 이 가방 안에서 아주 오랫동안 함께 숨 쉬기를 바랄 뿐이다.



맺으며 : 물건은 주인을 닮는다


내가 가진 것들의 의미를 곱씹어 본다.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명품은 하나도 없지만, 이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비로소 '나'라는 사람이 선명하게 보인다. 낡고 소박하지만 고집 있고, 실용적이면서도 다정한 나의 물건들.

이름을 붙여주자니 쑥스럽지만, 그래도 이들은 분명 나의 안식을 지탱해 주는 '남자의 물건'들이다. 이제 이들을 함부로 버리지 못할 것 같다. 물건이 낡아갈수록 그 속에 담긴 나의 역사와 사랑은 더욱 귀해질 테니까. 멋진 영감을 준 일면식도 없는 김정운 교수님께, 그리고 내 곁을 지켜주는 나의 작고 소중한 반려 물건들께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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