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가 내 어깨를 감싸며 신나서 떠들었다. 우리는 수돗가로 걸어가는 내내 오늘 경기에 대해 떠들썩했다. 땀이 격렬한 축구가 주는 개운한 뒷맛을 자랑하듯 훈장처럼 교복 위로 솟아올랐다. 나는 교복을 벗어 탁탁 털며 하늘을 봤다. 햇살이 눈 부셨고 운동장에 가득해서 내 몸도 금색 알갱이가 돋아나 반짝이는 듯했다.
그때 등 뒤로 공이 꽂혔다. 퍽
“억.”
“뭐야, 저 새끼! 괜찮아?”
정수가 물었지만, 숨이 먹는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비명을 지르게 할 거야.’라고 악을 쓰듯 공이 달려든 것이다. 그놈 짓이 틀림없다. 언제부터였지? 유범이가 날 공격하기 시작한 게? 괴롭히기 시작한 날 말이야. 모든 비극은 저녁노을처럼 슬며시 다가와서 등 뒤에서 휘리릭 휘장을 풀어. 끝내 어둠을 퍼트리지.
2. 2094시간 전
“야, 가자. 의리 없게 이러기냐?”
“나 알바 가야 해. 알잖아.”
“레드형이 너 데리고 오랬어. 안 데려가면 내가 얻어터져. 그냥 무슨 얘기하는지 들어만 보는 건데 왜 까탈질 이야?”
난 더는 내 사정을 말하기 싫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유범의 창백한 표정을 봤다. 녀석은 정말 겁먹고 있었다. 늘 말을 가볍게 던지듯 하는 녀석이다. 그래서 별일 아니겠지 했는데 유범이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일에 얽혀 있는 걸 짐작했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계가 5시 37분. 지금 가면 아르바이트에 늦지 않는다. 영화관까지 뛰어가도 10분은 걸리니까 50분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13분의 여유만 있다.
“자세히 좀 말해봐. 레드 형이 나를 데려오라는 이유가 자기 서클에 너랑 같이 들어오라고? 정말 그것뿐이야? 너 무슨 일 있지?”
“아, 씨발 뭘 자꾸 캐물어. 레드 형한테 좆나게 터졌다. 왜? 아, 몰라. 제기랄. 너 데려오라는데 내가 그 무서운 새끼한테 이유를 어떻게 물어? 그냥 좀 가주라. 죽이기야 하겠냐?”
“나 6시부터 알바야. 거기 쫓겨나면 안 돼.”
“아이 씨, 내가 돈 해줄게.”
“그런 말이 아니야 새끼야. 레드 형한테 아르바이트 끝나고 간다고 해. 오늘 사장님한테 1시간만 일찍 끝내 달라고 할게.”
“답답한 새끼. 너 그 아르바이트해서 얼마 버냐? 레드 형 밑으로 들어가자고. 말귀를 못 알아들어. 이 등신아.”
시계가 5시 4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
유범이는 아르바이트로 바쁜 나 대신새 친구를 사귀었는데, 그들을 학생이라고 불러야 할지 의문이 갔다. 그들과 어울려 못된 짓을 하다 그 구역 진짜 못된 놈. 레드 형 패거리에게 괴롭힘을 당했고, 친구인 내가 같이 가서 상황을 같이 견뎌주던, 같이 그들의 패거리가 되던 뭔가를 해주길 바랐지만,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우정이 중요했고. 달려가고 싶었고. 같이 맞아 주고도 싶었지만. 내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유범처럼 방황할 여유가 없었다. 골목에서 같이 자란 친구지만 같이 담배도 피우고 같이 밤거리도 헤매고 그러다 형들에게 맞기도 하고 그러면서 형들과 한 조직이 되어갈 수가 없었다. 유범은 나도 그러길 원했지만, 그것마저도 나에겐 사치였다. 삐뚤어지는 것마저도 사치라니. 제길.
엄마의 슬픔을 먹고 자란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방황도 내일이 있어야 하는 거다. 나에겐 내일이 없다. 그냥 이번 달 얼마를 벌어야 월세와 엄마 약값을 낼 수 있을지가 전부다. 내가 더 일해야 엄마가 일을 그만둘 수 있다. 엄마가 쉬게 하려고 나는 더 일해야 한다.
4. 492시간 전
레드 형이 날 찾는다고 창백하게 질려서 말하던 유범은 그날 이후 한동안 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돌아왔을 땐, 눈에 칼을 품고 있었고. 더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방황할 수 없는 나와 방황하는 유범은 그렇게 멀어졌고. 그에게 난 배신자가 됐다. 그때부터 나를 틈틈이 괴롭혔다. 그런데 요즘 괴롭힘이 점점 잦아진다. 유범이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교무실로 불려 다닐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횟수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