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남자친구가 청첩장을 보냈다
- 한뼘 소설 -
받지 말아야 할 것을 받으면 어떻게 하세요? 역시 당신은 눈치가 빨라요. 맞아요. 청첩장을 받았어요. 그것도 갈 필요가 없는 결혼식 초대장을요.
친분이 대단하지 않은데도 청첩장을 주는 사람이 이해 안 갔는데, 전 남자 친구가 청첩장을 주니 이해 안 가는 정도가 아니라 '뭔 허튼짓'이 먼저 튀어나왔어요. 내가 하는 허튼짓도 감당하기 힘든데, 남이 하는 허튼짓까지 내 영역을 침범하다니!
난감했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했어요. 전 남자 친구가 던진 공에 내 감정이 좌지우지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 공을 돼 받아치기로 했어요. 날렵하고 강렬하게. 무시해도 되지 않냐고요? 그럼 당신의 선택은 청첩장을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직행. 맞나요? 당신다워요.
하지만 당신의 방법은 내 경우엔 적용할 수 없어요. 전 남자 친구, 정확히 말해서 전전전의 전 남자 친구와 저는 캠퍼스 커플이라서 지인이 연결돼 있거든요. 안 가면 오히려 뒷말이 오고 갈 거예요.
왜 웃어요? 난 심각하다고요. 뭐라고요? 벌써 답이 나와 있다고요? 하긴 맞네요. 가야 할 자리네요. 그 녀석이 청첩장을 보낼 만했네요. 전 남자 친구이자 지인이군요. 그럼 가줘야겠어요. 웬 허튼짓이냐고 했는데, 우리 사이엔 재떨이 속 담뱃재처럼 남아있는 인연의 끈이 있네요. 비워버리면 될 것 같아도 냄새가 빠지질 않아요. 냄새뿐인가요 재떨이에 턴 재는 털어내도 재떨이에 검은 자국을 남기죠.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라니까요.
몇 년간 못 본 동창들이고 앞으로 안 봐도 그만인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이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제멋대로 지껄이게 할 순 없어요. 게다가 동창 결혼식도 안 간 의리 없는 전전전의 전 여자 친구가 되고 싶지도 않고요. 물론 나와 달리 그에게 나는 바로 전 여자 친구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불편하네요.
궁금하지 않냐고요? 지난 이 년간 떠올린 적도 없는 사람이 누구랑 결혼하는 게 궁금할까요? 뭐라고요? 거짓말하지 말라니요. 진짜 안 궁금해요. 전 남자 친구도 잊었는데, 전 전전 전의 남자 친구가 들어올 틈이 있을까요? 연애는 3개월 이상 쉬는 게 아니라서 내 나이가 되면 연필 한 다스의 전 남자 친구 리스트가 있답니다. 전 그 연필 케이스 속 리스트를 다 채웠고 지금은 다음 빈 연필 케이스의 첫 남자 친구를 만나고 있어요. 이 남자가 마지막 리스트가 돼서 두 번째 연필 케이스는 안 채워지길 바라는 건 진심이지만, X 남자 친구의 결혼 상대가 궁금한 건 0.1초 정도의 호기심이지 진심이 아니라고요. 진심을 아무 대나 갖다 붙이지 말아요. 그리고 에이 이것까지 말하긴 그렇지만, 가까이 와 보세요. 더 가까이.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 돼서요. 사실, 그 남자 섹스가 별로였어요. 달리다가 바로 방지턱을 못 넘고 멈추는 소형차 같다고 할까? 그러니 아쉬울 게 뭐가 있겠어요? 그의 정액이 내 안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그의 무엇이 내 안에 남았겠어요. 난 지금 내 남자를 사랑하기도 벅찬걸요. 다만, 그의 청첩장이 내게 가져다준 불편한 상황이 짜증 난다! 그것뿐인걸요. 그러니까, 불편한 것도 그 남자 때문이 아니라 그와 얽힌 인연 때문이죠.
왜 날 그렇게 쳐다봐요? 그 짓궂은 눈빛은 뭐죠? 당신이 상상하는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라고요. 왜 사람은 누군가의 인생을 가십거리로 만들고 싶은 걸까요? 결혼식 가기 싫은 이유가 바로 이거라고요. 당신 눈빛과 같은 종류의 불량한 호기심 때문에 불편해요. 그냥 던진 공이든 공격하려고 던진 공이든, 맞는 사람은 아픈데 말이죠.
그가 한 짓은 헛짓 맞네요. 매번 방지턱에 멈추던 그는 끝까지 내 인생에 헛짓만 하네요. 밥이나 먹으러 가요. 오늘 같은 날은 칼칼한 칼국수가 딱 맞죠. 네? 맞아요. X랑 갔던 칼국숫집 가서 잘근잘근 씹어줘야겠어요.